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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상업적 자본의 종속을 심화시키고 인간의 삶을 고비용 구조로 몰고 가는 현대과학을 어떻게 볼것인가.

 

www.jadam.kr 2003-10-31 [ 조영상 ]
우포늪에서..

과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전문가들이라고 명명되어진 자들의 성역이 되어 버린 듯해서 정말 써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곤 하다가도 주저주저하고 말았었다. 그러나 이제 마음의 고임은 글을 써야만 한다는 신념으로까지 발전해 부득이 이 글을 내놓게 되었다. 자연농업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필자와 같이 간혹 ‘과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생각들을 해 왔을 것이다.

 

부족하나마 그간에 정리된 생각을 여러분들 앞에 드러내 놓는다. 지나치게 편협된 생각이라고 판단이 되더라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현대과학 내에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너그러움으로 이 글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 과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각종 홍보 매체를 통하여 너무도 가까이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현대과학의 활동상은 이제 한 인간의 인생관과 일상적인 사고체계, 더 나아가 사회적 의식과 문화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만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기에 이 시대를 살면서 과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자신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중요한 근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현대과학을 인간의 주관적인(또는 상업적인) 의도와는 독립된 객관적 사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데 절대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객관성을 표방한 현대과학은 학문적으로 지극히 순수한 영역이라는 대중적 이해를 끌어들이면서 과학을 ‘절대적인 신성함’으로까지 이해하게 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존 호건’이 쓴 『과학의 종말』(The End of Science-까치,1997)은 현대과학의 각 부분별로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며 해당 학문의 영역에서 과학의 종말적 근거들을 정리하여 실었다.

 

존 호건은 현대과학을 이끌고 나가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새로운 과학기술 분야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이 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바로 상업적 가능성이 새로운 과학적 분야의 존립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류사회에 공헌할 만하고 독창력이 뛰어난 과학기술일지라도 경제적 이윤창출의 가능성이 없는 부분은 예산을 확보할 수 없어 사장되고 말아 과학적 순수가 살아 있는 과학은 현시대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 현대과학이 만들어 내는 공백(空白)

 

전세계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개방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집행하는 예산조차도 상업적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 대부분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연일 새로운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이 사회를 금방이라고 환상적인 유토피아로 이끌 것 같은 느낌을 만들곤 하는 과학의 홍수시대에 살지만, 수많은 과학들은 결국 상업성을 전제로 하는 것들뿐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사장되고 만다는 현실 앞에, 과학은 무한한 영역으로 확장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채택과 비채택이 남긴 ‘엄청난 공백’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 현대과학은 어떤 힘에 의해 견인되고 확장되는가

 

주관성이 완전히 배제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현대과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과학이 어떤 힘으로 움직여지는가 그 실체를 보다 명확히 인식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과연 과학은 나 한 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업성을 전제로 개발된 과학이 주장하는 연구의 객관성은 국소적 사실로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학문적 순수성을 이미 상실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주관적 의도가 완전 배제된 순수한 연구들의 집적이 현대과학의 학문적 성스러움은 이미 상실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절대적인 신성함’으로 다가오는 과학

 

화려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현대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너무나도 거대한 질문이기에 이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되어야 변변한 답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같은 과학의 실수요자가 더 쉽고 간단하게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릴 수 있다. “과학이란,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하고 보다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상업적 수단이다.”라고.

 

상업성을 전제로 한 과학이란 이런 범주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신성함’으로 과학을 이해하는 대중은 상업적 과학이 의도하는 그 길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 글은 현사회의 산업 구성에 절대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첨단과학의 존재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인해야 한다는 우매한 논리를 펴고자 함이 아니다.

 

필요하든 그렇지 못하든 과학의 가치를 부인한다면 이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문명 하에 사는 자신을 부인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가 있다. ‘첨단과학’이 ‘생활과학’을 밀어내고 있는 점이다.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우리의 삶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했던 시민적인 생활과학이 우리의 일상에서 강제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따라 한 개인으로서 해결해 나갈 직접적인 영역은 거의 축소되고 인간의 정체성은 크나크게 변형되어 가고 있다.

 

-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과학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든, 이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이미 차지하고 있든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과학은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동시에 ‘존재의 향기’를 더욱 그윽하게 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대과학은 인간을 감각적인 듯하면서도 무미건조한 소비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너무도 소중한 인간의 ‘서정성’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현대과학은 인간의 내적, 외적 모든 문제에 있어 항상 새로운 외부적 대안을 등장시켜 한 인간의 독립성을 해체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을 부분적이고 종속적인 구조적 수인(囚人)으로 인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 농약회사 연구비를 지원 받는 박사들

 

몇 년 전 농업전문가(박사)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한 방송국 PD는 평소 좀 알고 지내던 모 박사에게 “당신 박사학위 과정에 농약회사 연구비 지원받았다며, 그러면서 무슨 환경농업이야?”하며 한 잔 한 김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자 모 박사가 흥분하여 말하길 “여기서 농약회사 돈 안 받고 박사 된 놈들 있으면 나와 봐.” 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교수는 물론 농학박사과정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농약•비료회사의 연구비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추후에 재확인하고는 한국 농업의 어두운 현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기막힌 예를 들어 본다. 본인이 대학원 세미나 발표 때 겪었던 황당함이다. 환경농업의 필요성에 관한 세미나여서 농약과 화학비료로 인한 토양오염에 관한 국내 논문들을 찾아보았으나 단 한 사람의 논문만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는 사실, 대부분의 논문은 농약을 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토양이 회복된다는 판에 박힌 시나리오를 재반복하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그 논문에는 기존의 논문이 주장했던 농약사용 후의 토양의 정상적인 회복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절대 다수의 논문은 종류별 미생물의 수가 일정 기간 이후에 정상적인 숫자로 회복되었다는 결과를 내놓고 농약이 분해되어 토양에는 장기적으로 악영향이 전혀 없다는 농약회사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나팔수 논문’들이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농약을 친 후 살아남은 미생물의 형태를 세밀히 연구하여 농약을 친 후에 미생물상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 있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변형된 미생물들은 환경적응 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환경적 변화에 민감한 토양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따라서 농약은 토양에 해를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 유일한 논문이 된 것이다.

 

절대 다수의 농업전문가와 단 한 사람의 전문가, 그 전문가의 이름조차, 명성조차 절대 다수인 그들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획기적인 연구결과는 이미 사장되어 버렸고 절대 다수의 전문가들은 연일 이어지는 각종 실험적 근거를 제시하며 ‘농약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피해가 없다’는 주장을 아직도 펼치고 있다. 모든 논문들이 엄정한 중립과 개관적 사실을 토대로 작성된다 하더라도 연구자 개인이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나올 수 있음을 너무도 대별되는 결과를 내놓은 두 종류의 논문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 참된 연구의 존립의 가능성 농약

 

화학비료등의 대형기업들에서 나오는 막대한 연구지원비가 그들이 생산하는 제품들의 악영향에 대한 연구를 절처히 차단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왜 악영향을 입증하는 연구는 연구비를 좀처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절대 다수의 결과를 뒤엎는 결과를 낸다 해도 참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앞에서도 설명을 했듯이 상업성이 전제된 과학, 농학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본다. 농학(農學) 역시 사회 전반적인 과학의 흐름을 역행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그리서 농업을 논하면서 함께 과학을 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농업기술이 등장하여 ‘개벽천지’를 할 것 같이 연일 떠들어 대지만, 진정 과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꼼꼼히 그 기술이 왜 필요해졌는가 의문을 던져 보아야 마땅하다.

 

이 나라의 농업 연구의 흐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시대적으로 환경농업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왜 그 분야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할까 문제는 거대한 ‘자본의 힘’이 아직 환경농업 쪽으로 이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해 긍정적이고도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과학을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 언저리들의 힘

 

이 글의 의도가 기존 학계의 새로운 변화를 열망하는 것이라면 ‘난센스’다. 그들이 변하길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 농민을 위한 농학의 실현은 멀고도 먼 길이다. 기업을 움직이고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 이미 농민에게는 없는 듯하다. 3회에 걸쳐서 본지에 연재한 월드워치연구소에서 발표한 글 ‘농민은 어디로 갔는가’를 관심있게 읽어 보기 바란다. 위기의 농민 그 기저에는 무슨 힘이 도사리고 있는가. 바로 막강한 과학의 힘이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여지는 ‘무서운 과학’을 근거로 해서 농민은 철저히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쓸쓸하다. 항상 이 사회 속에서 ‘언저리’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저리들의 가능성, 그들의 창의적인 노력들이 새로운 농업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느냐는 둘째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과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자연의 풍요로움을 더할 수 있는 것이 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농업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언저리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자연농업, 농업을 농업답게 하고 농민을 농민답게 하는 ‘세기의 비전’으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

 

자연농업인이여! 언저리들의 힘이여!

 

조영상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10.3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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