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순례를 중단했다. 집때문이다. 주인이 없다고 군청에서 발주한 수해복구일환으로 개울공사를 하는데 전기를 끊고 산 위쪽에서 관을 묻고 물을 끌어다 쓰고있는 상수도관도 포크레인이 공사를 하다 끊어버려 물도 단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정도 참을 수가 있다. 작년겨울 보길도에가서 강제윤시인의 배려로 얻어온 귀한 흰동백꽃 애지중지하며 겨우내 방안에서 키우다 올 봄 연못가에 잘 자리잡아 옮겨심었는데 아, 올 겨울 흰동백꽃 송이송이 매달려 그 동백꽃 그늘에 앉아 술잔치 거나하려했는데...

포크레인 레일에 짖뭉개져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날 원망했을까. 한발한발 다가오는 궤도차량의 굉음앞에서 두발을 땅에 묻고 움직일 수없는 뿌리를 내린 것이 이렇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절망했을까.

사진첩에서 올겨울 찍어두었던 그 흰동백꽃 꺼내어 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 www.jadam.kr 2004-09-14 [ 박남준 ]

흰동백꽃은 이제 다시 볼 수없다. 그 옆 올 봄 내가 죽은 쥐를 묻어주었던 앵두나무도, 석류나무도 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하루밤을 쥐와 전쟁같은 숨박꼭질을 하며 겨우 생포한 쥐를, 마당에 나가 퍽퍽 화풀이를 하며 때려죽인 쥐를, 앵두나무아래 묻으며 시를 쓰기도 했다.

쥐와 함께 놀았네

밤새 숨바꼭질을 하다 다듬이 방망이로 퍽퍽

분 풀이었네 죽음에 이르는 놀이였네

죽은 쥐는 주로 남의 것만 훔쳐먹었으므로

뒤뜰 앵두나무 밑에 묻었네

앵두꽃이 피고 앵두가 익어 가면

그 앵두 바라보며 죽은 쥐 생각하겠네

쥐가 몸을 바꿔 거듭난 앵두

앵두는 쥐를 먹고 나는 앵두를 먹고

앵두를 먹으며 생각해봐야겠네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이루는 것들

쥐가 먹은 것들과 앵두가 먹은 것들과

나로 인해 드러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몸에 대해

내 몸을 바꿀 무엇에 대해

-<쥐와 앵두가 묻기를>

올 봄 앵두꽃이 하얗게 피고 앵두가 많이 열리기는 했다. 순례를 떠나느라 붉게 익은 앵두 하나 따먹어보지 못했다. 연못에 살던 백련도, 애기수련도, 노랑어리연꽃도, 다슬기도 짓뭉개져 함께 먼세상으로 길을 떠났다. 집을 두고 순례를 떠난 탓이다. 나 때문이다. 내게 집이 생겼기때문이다. 돌봐주어야할 집을 가졌기 때문이다. 돌보지 않은 나때문이다. 집밖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탁발순례를 떠났으나 정작 집안의 생명들이 고통속에 죽어갔다. 포크레인기사만을 어찌 탓하랴. 그들의 눈에 다만 모든 나무는 한갓 나무였을리라. 다만 풀들이었으리라.

쿵쾅대는 포크레인 소음속에서 벌써 한 열흘을 넘게 보낸다. 집이 내 발걸음을 묶는다. 종일본가, 하루종일 집에 갇혀있다.

이제 전기도 들어오지만, 물도 다시 이어졌지만 내가 이미 내가 아니듯 집 또한 옛집이 아니다. 옛날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도 그와같으리라.

박남준 시인,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4.09.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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