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에서 부르는 사모곡 |
|
사진사랑시사랑
2004-06-30 16:14:14
|
조회: 11273
|
|
|
월간한민족(5월호) → 사진사랑 시사랑
정주은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초대작가(사진부문)
시인 / 칼럼니스트
| |
|
|
|
border=0>
|
border=0>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056.jpg" width=465
name=zb_target_resize> |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poem.gif"
name=zb_target_resize>
src="http://www.monthlykorean.com/images/people/Kim_Do_Su.jpg"> |
|
광양제철소에 다니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달려가 고향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진뫼마을 주말명예이장 김도수 씨. 그의 고향지키기는
유별나다. 그는 마을 앞 강물에 농로용 시멘트 다리가 놓이면서 사라진 징검다리를 복원하였고, 언젠가 사라져 버린 어머니들의 빨래바위이며 마을
수신령 역할을 했던 ‘허락바위’를 수소문해서 찾아 어느 기관의 준공기념비로 서 있는 것을 ‘허락바위 이전 촉구서’를 작성하여 동네 어른들과
출향민들의 날인을 받아 해당기관에 보내어 결국 제자리에 갔다 놓았다. 섬진강 적성댐 건설 계획으로 그의 고향이 수몰위기에 몰리게 되자 그는
주머니를 털어 ‘섬진강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여 적성댐 건설 반대에 두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의 사촌형인 김용택 시인의
문학적 고향이자 영화 아름다운시절, 춘향뎐, 남부군과 드라마 허준을 촬영한 천연의 아름다운 절경과 생태계의 보고인 고향을 지켜달라고 각양각지에
호소하여, 결국 섬진강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 적성댐 건설을 보류시켰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과 고향별곡을 한권의
책으로 묶느라 정신이 없는 김도수씨를 만나 구성진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밤새 들어보았다.
|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057.jpg" width=465
name=zb_target_resize> |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냥 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그러냐 안.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 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 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058.jpg" width=465
name=zb_target_resize> |
|
쉴새없이 구시렁거리며 흐르는 섬진강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잎보다 먼저 고개를 내민 연분홍 매화와 샛노란 산수유꽃이 화사한 햇 살을 꼬옥
잡고 놓지 않는 봄날, 40대 중반의 김도수씨는 이지엽 시인의 詩 ‘해남에서 온 편지"를 읽다 말고 울컥 솟아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에 눈물을 주루룩 쏟고 만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고향 진뫼마을 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그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 손잡고 다녔던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뫼마을은 아마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을 것이지만 산모롱이를 끼고 돌아가는 그
구비진 길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나 있었다. 이제 20여채 밖에 남지 않은 그 고향 길을 차보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서 대문도 없는 집의 돌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숨가쁜 목소리로“오메”를 부르면, “오야, 내 새끼, 이자 왔는가?”고 부엌에서 밥
짓다 환한 미소로 달려 나오시던 어머니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059.jpg" width=465
name=zb_target_resize> |
|
73년 여름, 7남매 중 제일 똑똑했던 셋째형을 "106 학군단 김용식"이란 명찰과 함께 큰집 밤나무 밭 묵정밭에 묻었던 어머니는 사는
동안 하루도 큰집 밤나무 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늘어나는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하였고 그 독한 연기를 가슴속이
아리도록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은 농사로, 겨울에는 나무하러 산을 오르내리시며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나가 정신없이
바빠야 니 형 생각이 안낭께......”
자식들과 배 곪아 가며 도롱고테 논을 사느라 지지리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 자식들을 위해
쌔빠지게 일하며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평생 손톱 속에 흙을 넣고 사시다 천금같은 자식 먼저 보내고 눈물과 한숨으로 사시던 어머니가 온갖
시름을 다 내려놓고 세상을 떠난 지 숱한 날들이 지났지만 스물이 훌쩍 넘도록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들었던 막내아들인 그는 어머니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때문에 그의 고향에 대한 생각 또한 유별나다 못해 병적이기까지 하다.
|
|
src="http://www.monthlykorean.com/article/may_2004/images/060.jpg" width=465
name=zb_target_resize> |
|
어머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고향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점점 폐가가 되어갔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고향집을 지켜보면서 틈만 나면 집주인에게 쫓아가 절대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말고 꼭 나에게 팔라며 통사정을 하던 그는 3년 전 드디어 고향집을 몇
십 배를 주고 사서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늙수구레한 중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폐가로 방치된 집을 다 수리하기도 전에 겨우 잠만 잘 수 있게
해놓고 어머니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던 6남매가 모두 모인 그날은, 아내와 자식을 먼저 보내고 허허롭게 사시다 결국
어머니를 따라 가셨던 아버지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시름에 젖어 사시던 어머니도,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떴던 불효 막심한 셋째형도 모두 모여
막걸리 잔을 돌렸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벽에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걸다 그는 그만 컥컥거리며 목울음을 삼켰다. ‘오메, 어찌 그리도
더디게 이제서야 오시었는가…’
어머니의 별칭인 ‘월곡댁’을 따 붙여진 ‘월곡산방’(月谷山房). 고향집 문밖에서 발자욱 소리만 들려도
어깨 움츠리고 숨을 죽이다 덜컥 방문 열곤 어머니 없는 텅 빈 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니 돌담에 어머니의 열두 조각 서러운 무명저고리가 눈 시리게
널려 있었다.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북망산천 먼길 떠나시던 날, 쭈글쭈글한 엄마 젖을 만지며 까칠까칠한 볼에 얼굴을 살살
비벼보기도 하고 소가죽처럼 단단해진 손을 어루만지다가 손톱 속에 낀 흙을 넋 놓고 바라보던 막둥이.
진뫼마을에 어머니의 꽃상여가
나가던 날, 어머님이 심어놓은 보리들이 상급배미 논에서 파랗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파란 보리 싹들을 밟지 못하고 지나가는 어머니의
꽃상여를 그는 기어이 논바닥에 내려놓고 보리 싹들을 다 짓밟았다.
“엄마! 엄마는 어찌 이리도 무정하게도 빨리도 가분가. 엄마,
나 한번만 보고 잡다고 말하고 가. 엄마! 엄마 없이 나 이제 어떻게 살아가. 엄마!” 꽃상여를 붙잡고 ‘엄마 가지마 엄마 가지마’ 하며 통곡을
했던 그 막둥이가 먼 밤길 대문 없는 막다른 골목집에서 오늘도 웁니다. ●
사진/김도수, 글/정주은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