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닮

자닮 게시판 [ 모두 함께 참여하여 만드는 초저비용농업의 해법! ]

가을 단상- 길, 집, 무덤 그리고 21세기 타임캡슐 - 이원규 시인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밴드 카카오스토리
평화은어 2004-10-02 21:48:01 \| 조회: 3890

이 가을에 문득 생각하나니, 길이 곧 집이었다.
지리산의 외딴집을 나선 지 2백여 일, 5,000리 정도를 걸으며 생각하니 길이 곧 집이었다. 집 밖에 어디론가로 향하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모든 길이 곧 집이었다. 집과 길은 자웅동체의 한 몸이었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게 바로 길이었다.

나그네는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발바닥 밑이 모두 안방 구들장이요, 마을입구의 당산나무 그늘이 바로 집이요, 숲 속의 잘 모르는 무덤도 집이다. 나그네는 가야할 길이 따로 없고 이 세상 어디에나 다만 늘 도착하는 집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그네는 함부로 자살하지 않는다.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집은 무엇인가. 일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 두 평의 집, 무덤 하나 가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집과 무덤으로 곧바로 향하는 무한질주의 행로 속에 과정으로서의 길은 적당히 생략되어도 좋은가. 그것이 인생인가.

과정으로서의 길을 생략하고, 길이 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집착과 욕망으로서의 집만 존재할 때 오히려 우리는 자주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잃은 길도 길이요, 좌불안석의 집도 집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더더욱 혼돈의 길이 아닌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과와 목표만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그 화사해보이던 결과의 꽃마저 바로 죽음의 조화요 무덤 자리일 뿐이다.

하여 이 가을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것 아닌가. 벌초와 성묘는 감사와 반성과 참회의 한 양식이다. 이 세상을 물려준 조상에 대한 감사의 큰절이자 무언가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요, 새로운 다짐의 소중한 의식이다. 바로 여기에 인생살이의 핵심이 있다.

살다보면 너무나 힘들고 앞길이 캄캄할 때 우리는 소중했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간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힘들 때는 무덤을 찾지 않는다. 왜 그럴까. 평상시에는 정신없이 잊고 살다 집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인생, 그 과정의 실체를 바로 보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소중했던 이들이 행여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 성찰, 이것이 오히려 삶을 풍성하게 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객관화 시켜보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길이 곧 집이요, 집이 곧 무덤이다. 그리하여 무덤이 곧 인생을 되돌아보는 길을 제시하니 나그네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먼 길을 가다보면 무슨 사연인지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를 안고 우는 여인이 있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다 어깨를 들썩이며 홀로 강변을 걷는 사내가 있다. 아파트 난간을 넘어 허공으로 한 발짝 내딛는 남과 여가 있으며, 농약을 마시거나 칼을 휘두르는 이들이 있다. 어차피 인생은 고해라지만 모두들 집과 무덤 사이에서 문득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가을의 나그네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문득 삶이 팍팍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절망적일 때 가장 가까운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친족이나 친구가 아닌 잘 모르는 이의 무덤이라도 좋다.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무슨 사연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잘 모르는 이의 무덤 앞에 소주라도 한 잔 올리고 큰절을 해보라.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에게 고해의 상담을 해보라.

‘당신은 살아생전에 문득 삶이 팍팍해질 때 어찌했는지, 슬프고 외로울 때나 절망적일 때는 또 어찌했는지, 행여 지금 무덤 속에서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또 물으며 펑펑 울어도 좋다. 그러고 나면 알게 되리라.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던 길보다 더 환해지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설사 원수라 하더라도 가까운 이들을 위해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마침내 알게 되리라.

우리가 죽어 마침내 무덤을 집으로 삼을 때 후세들에게 물려줄 ‘21세기 타임캡슐’은 지구를 덮어가는 쓰레기 매립장이나 무덤뿐만이 아니다. 바로 집과 무덤 사이의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길이다. 그대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하나 둘 찍고 있는 발자국들의 화석,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타임캡슐이자 희망의 길이다.

-가을 단상- 길, 집, 무덤 그리고 21세기 타임캡슐(주간동아 칼럼 9.30 )
- 이원규(시인, 생명평화탁발순례단 팀장)

2004-10-02 21:48:01

게시물 댓글과 답글 4개

최신순 추천순 게시물보기

평화은어 2004-10-07 03:12:07
오는 15일에 지리산에서 평화대회를 하는데 사진 전시회도 있거든요. 등불 단 집들 사진중에서 오렌지제주님 사진이 돋보이네요. 그러고보니 문사철시서화님, 오렌지제주님 다 저희 등불님이시네요. 15,16일에 지리산에서 꼭 뵈요. 흙이랑 님도 오세요.

답글 0

추천 0 반대 0
0/1000
오렌지제주 2004-10-05 07:13:31
평화은어님!
이시인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두 스님과 박남준 시인님과 탁발순례단도.....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나요?
건강하게 일정을 마칠 수 있기를.....

답글 0

추천 0 반대 0
0/1000
문사철시서화 2004-10-04 15:11:26
원규 형님~
완전히 길(道) 위에서 道를 닦으셨습니다!!
그런데요, 道 너무 닦지 마세요.
같이 사시는 분 더 외로워지십니다.ㅎㅎㅎ

답글 0

추천 0 반대 0
0/1000
흙이랑 2004-10-04 14:27:11
좋은 내용이네요.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한번쯤은 뒤돌아 보면서 자기가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것 같습니다.

답글 0

추천 0 반대 0
0/1000

-1 -

글쓰기

번호	제 목	닉네임	첨부	날짜	조회
공지	후원자님들께 자닮농장을 오픈합니다! (6월 4일, 화, 오후 2~4시) (14)	운영자		2024-05-27	201698
공지	후원자 분들과 매월 말 줌(ZOOM)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운영자	-	2024-05-23	212966
공지	노동력 80% 절감하는 Y자 고추 지지대 (개발자 전희수) (3)	운영자		2024-05-14	300992
공지	자닮농장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실시간 공개되고 있습니다. (13)	운영자		2023-05-19	1377592
공지	(NEW) 자닮 천연농약 전문강좌 '충남대 백마홀'서 매월 개최!! 농약값을 1/20로 줄입시다~ (54)	운영자		2022-08-30	1702926
공지	은행 열매, 삶은 물 구입처 (노란은행으로 만듬) (7)	운영자		2021-09-25	1558373
137	보고싶은 앵두님께... (7)	들꽃향기	-	2004-10-15	3377
136	내장산 단풍 구경 하세요 (6)	산야로	-	2004-10-15	4691
135	감기주의보! (7)	무소유	-	2004-10-14	3435
134	가을 섬진강에서 (8)	파르 티잔	-	2004-10-14	3520
133	오늘 큰애 학교에 시험 감독을 갔쥬... (7)	늘푸른유성	-	2004-10-14	3788
132	2004년가을 토미.이젠 나도 토미부자......? (4)	연지도사		2004-10-13	3791
131	회원님들께 2004년도산 무농약햇배즙(상표:가족행복두배) 인사드립니다. (2)	가족행복두배	-	2004-10-13	3795
130	3편 "경쟁자들의 강점을 모아 당신의 사이트에 활용해야 한다." (1)	파르 티잔	-	2004-10-13	3785
129	품평회 출품 안내	자연농업협회	-	2004-10-13	3564
128	어제는 마음이 부자가 되는 날 이었습니다. (11)	늘푸른유성	-	2004-10-13	4529
127	sos (1)	연화성	-	2004-10-12	3414
126	2편 "방문자들의 사이트 이용에 대한 ＇감사＇ 이벤트를 기획하라." (2)	파르 티잔	-	2004-10-12	3763
125	대구 가을단식캠프 일정입니다.. (3)	길을걸으면	-	2004-10-12	3788
124	정말 감사의 글을 띄움니다 (3)	달홀	-	2004-10-12	3848
123	<일간잡지마을> 제오십삼호 : 춘천 부귀리 "물안마을" (3)	정풀홀씨	-	2004-10-12	4887
122	늘밭님과 초원님께 문의!! (3)	무소유	-	2004-10-12	3745
121	청정지역 신선한 북한상품과 우리나라상품 (2)	altong	-	2004-10-12	3605
120	경북 봉화에 이춘도님을 만나다.. (3)	지리산숨결	-	2004-10-11	3713
119	농산물 마케팅 이것이 중요하다. 1편 "온라인 쇼핑몰 5가지 성공 전략" (4)	파르 티잔	-	2004-10-11	3559
118	이렇게 가을을 ... (12)	지리산숨결	-	2004-10-11	3803

글쓰기

-이전 1021 1022 1023 1024 1025 1026 1027 1028 1029 1030 다음 -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