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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11일 새벽, 일한의 담당의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한양행 관계자들이
속속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병실 안에서는 재라와 순한, 그리고 평소
유일한과 절친했던 몇몇 사람들이 일한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 나절이 지난 후, 병실에서 재라와 순한의 통곡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버지, 나를 이렇게 두고 가시면 난 어떡합니까?"
"오빠, 오빠, 오빠마저 떠나가면 이 순한이 누굴 의지하고 산단 말이오."
아내와 아들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유일한은 파란만장하면서도 올곧았던
76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오전 11시 40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족들이 유일한의 유품을 정리해보니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밖에 없었다.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은
치러졌고, 4월 8일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장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 불을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달라고 하면서 이런 부탁을 덧붙였다.
'유한동산에는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업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일한은 이 신탁기금에 이미 9만 6천 282주를 기증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23만 7천 223주를 소유하게 된 신탁기금은 나중에
유한재단으로 발전하여 유한양행 최대주주가 된다.)
넷째, 아내 호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아내에게도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이 없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는 말만 남겨놓았다.
여섯째, '아무에게 돈 얼마를 받을 것이 있으니 얼마는 감해주고 나머지는
꼭 받아서 재단 기금에 보태라'는 식으로 세세한 금전 거래까지 밝히고 있다.
일한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언론매체에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나의 전재산 학교 재단에', '아들엔 한푼없이 자립하라' 식으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 하였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일한의 결단과 정신은 우리사회에서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다.
- 유일한 평전의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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