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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과 12월 사이
영농일지)
(사진을 클릭하시면 대따 크게 볼 수 있음)
36년전 이맘때 우리의 농촌풍경을 회상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영농일지다.
무 배추를 뽑고 김장을 했다. 헌 지붕도 교체를 하고 메주콩도 끓이고 수확한 농작물은 저장하고...
본격적인 겨울 채비를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동생과 둘이서 묘사를 지내면서 허전한 마음에
2년전 작고하신 아버지(깐돌이 할배)를 추모하셨다. 20일간 일한 인부(김군)의 품삯이 6,270원이었다.
당시의 수리조합세와 농지세를 통해 물가와 정부의 정책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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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과 71년 사이의
영농일지)
(이것도 클릭하면 대따 크게 볼 수 있을껄)
70년도 인부상황에서 특이할 만한 상황은 김군의 대활약이다. 모내기철에도 와서 도왔고
가을철에 또 와서 도왔다. 어렴풋이 기억나건데 아마도 도시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다가
농번기 때 마다 우리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농사일을 도와 주셨던 고마운 아저씨였던거 같다.
11월 말부터 가마니를 짜기 시작해서 총 25매를 짰다. 당시의 겨울, 우리의 농촌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풍경이다. 돌아가신지 2년이 된 아버지(깐돌이 할배)의 제사에는 사무친 마음에 동네 어른들을
대접했다는 기록도 있다. 동장으로 최진태라는 분이 선출되었는데 아직 고향에 살아계신다.
큰형님은 보약을 드셨고 짧은 혀 수술도 했다. 농우를 팔고 사면서 18,000원의 이득을 보았다.
당시 큰 소 한마리 가격이 10만원을 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공책의 빈공간 하나없이 빽빽하게 활용하신 아버지의 절약정신이
돌아가신 지금도 깐돌이를 꾸짖고 계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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