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가을 장마가 자그마치 14일간 계속되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자 수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사과나무는 주렁주렁 달린 사과를 마구 떨어뜨러더군요.
료카 품종 하나에서만 약 30박스를 주워냈습니다.
얼마나 아까웠던지 아내는 허리굽혀 주울때마다 눈물 한방울씩을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나는 그 위를 리어카로 밟으며 지나갑니다.
과원 한구석을 굴삭기로 파고 낙과(落果)를 묻으며
이젠 끊은지 오래되어 그 맛의 기억도 가물가물한 담배가 지독하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녁부터 감기 몸살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몇번은 정신을 놓기도 했었나 봅니다.
아내는 그러찮아도 만사가 짜증나고 귀찮으련만,
밤사이 내 곁을 뜨지 못하고 겨드랑에 손을 넣었다가 물수건을 이마에 올렸다가 이리저리 애닳아 합니다.(쯧쯧~~ 서방이 뭔지...)
감기란 게,
약을 먹으면 일주일만에 낫고, 약을 안먹으면 칠일동안 아프다더니....
병원에 다니고,
먹었다 하면 병든 달구새끼 모양 꾸벅대게 만드는 약봉지를 여드레째 먹고 나자 몸이 살풋 가벼워집니다.
그 와중에 일꾼을 사고 적엽(適葉:나뭇잎 따기), 알돌리기, 반사필름 피복등을 일사천리로 끝내고 이젠 수확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가장 즐거운 콘테이너 박스 씻기를 합니다.
난 이 일이 세상에서 제일 즐겁습니다.
고압호스에서 뿜어져 나가는 물줄기가 시원스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속시원하고 후련하게 씻겨져 나가는 일년동안의 더러움이 화악하니 사라지는 게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연탄공장에 가면 검정이 절로 묻듯,
물줄기에 온몸이 흠뻑 젖어가며 하루 왼종일 콘테이너 박스를 청소합니다.
나는 나의 인생이 즐겁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좌절하거나 꺾이는 걸 두려워 합니다.
나는 나의 인생이 부유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태하거나 생각없음이 두려워집니다.
나는 나의 인생에도 더럽혀진 오물이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그리 부끄럽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번쯤 수확을 앞두고 저런 세찬 물줄기로 씻겨지듯, 내 더러운 마음의 오물을 세척합니다.
똑같은 실수의 오물이 내 정신과 육신을 다시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며...
정읍 농부 미루사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