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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도(戒刀)으뜸의 가르침(종교)을 받드는 이들의 영적 기백이 녹슨 칼처럼 무디어진 오늘, 우리가 모시는 큰어른은 금방 숫돌에 간 시퍼런 ‘계도’ 하나씩 가슴에 차라고 말씀하신다.
고 진 하 시인

www.jadam.kr 2008-01-14

동해안의 한 암자에 칩거하시던 친구스님이 찾아오셨다.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구도의 길을 걷는 사이라 우리는 격의 없이 10여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그동안 적조했던 터라 뜨거운 포옹도 하고,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 가까운 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스님이 잿빛 두루마기를 벗는데 얼핏 보니, 허리춤에 작은 은장도 하나가 달랑달랑 매달려 번쩍이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내가 물었다.

“아니, 스님이 웬 칼을?”

스님은 그 불콰한 얼굴에 예의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대꾸했다.

“목사님, 내가 아직 사람이 많이 덜 돼먹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본분을 어기는 짓거리를 했을 땐 이걸로 콱….”

이렇게 말하며 스님은 은장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 그게 계도(戒刀)인 셈이군요!”

“허허, 한데 이렇게 계도만 차고 다니면 뭘 합니까. 제 맘을 잘 다스려야지.”

“스님이야 깊은 암자에 칩거하시며 만날 마음 닦는 무릎공부 하시는데, 계도 따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물건은 이 속세에 몸 붙여 사는 어리석은 중생에게 소용될 듯하니, 그 칼 나에게 주고 가시오.”

그렇게 해서 나는 스님에게서 계도를 얻었다. 계도를 차는 것보다 제 맘을 잘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즉석법문과 함께.

다른 집안의 일은 잘 모르지만 요즘 내가 속한 예수네 집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저마다 계도 하나씩 차고 다니며 제 맘 단속에 철두철미해야 할 시절이지 싶다. 집안의 큰어른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은밀히 칼을 준비하라 일렀는데, 그 칼을 나는 자기 영혼을 잘 갈무리하는 데 쓰일 계도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동안 이 물욕의 세상을 탐닉해 ‘참인 것’과 ‘참 아닌 것’, ‘무상한 것’과 ‘영원한 것’, ‘소멸하는 것’과 ‘불멸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의 칼이 무디어져 버렸다. 분별의 칼이 무디어지면 그가 어느 종가에 속해 있든 영적인 진보는 기약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저잣거리의 상혼이 씌어 자기 삶의 궁극적 근거인 하나님도, 진리도 거래하려 하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높이 솟구쳐 하늘로 비상할 줄 알면서도 썩은 고기를 탐하는 대머리독수리처럼 가슴에 단 명찰은 하늘나라 주민을 자처하면서도 황금과 자기 영혼을 맞바꾸고 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직을 제 핏줄에게 대물림하고, 영성수련이니 뭐니 하여 인간 속에 하늘이 값없이 준 영원한 생명의 보물이 있음을 일러주고 그 대가를 뜯어내는 파렴치한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어리석음인 줄 모르는 이들도 있는 듯하니, 가히 영적인 치매현상이 도를 넘고 있는 것이다.

집안의 큰어른께서 ‘비움’과 ‘버림’의 미덕을 거듭거듭 말씀하셨거니와, 그건 아마도 오늘 그분의 종지를 따르는 무리가 저마다 ‘분별의 칼’과 동시에 ‘금욕의 칼’을 지녀야 함을 이르는 말씀일 것이다. 금욕의 칼은 저질스러운 욕망을 차단하여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며, 그렇게 정화된 마음일 때 비로소 영적인 성숙을 위해 발돋움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고이는 것이다.

하여간 하늘생명을 품고 사는 이들이 지녀야 할 숭고한 욕망은 우주적 신성과 하나 되기 위한 참 자아의 실현에 오롯이 마음을 모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기 집안의 융성에만 혈안이 되어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다른 집안을 배타시하는 옹졸한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무릇 종교도 지상의 한 형식이라는 자각이 우리에게 있다면, 오지랖 넓은 집안의 큰어른처럼 사심 없는 자비와 관용으로 다른 집안의 무리와 오순도순 평화의 세상을 여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으뜸의 가르침(종교)을 받드는 이들의 영적 기백이 녹슨 칼처럼 무디어진 오늘, 우리가 모시는 큰어른은 금방 숫돌에 간 시퍼런 ‘계도’ 하나씩 가슴에 차라고 말씀하신다.

영혼의 적은 바깥에 있지 않고 항상 네 안에 있으니, 그 적을 먼저 다스리라고. 그 적을 제압하려면 영혼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고진하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8.01.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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