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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의 길 7 - 섬진강변에 이장이 면접보는 마을(김용전/새우골산방)

www.jadam.kr 2009-03-26
올 6월 초, 달님네 밭에 오이 하우스 만들러 갔다가 한 장 찰칵! 앞에 보이는 쇠 지렛대를 '뎃꾸'라고 부르는데 저 놈으로 땅에 구멍을 뚫은 뒤에 하우스 활대를 박아 넣는다. 건너편 소나무는 나이 300살이다

쌍용 계곡을 포기하고 난 뒤의 발길이 향한 곳은 전남 곡성의 한 마을이었다. 여기에 ‘한 마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마을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취락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아주 그림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25 가구 가옥들이 담장 하나로 올망졸망 붙어서 마을을 이루었는데 계곡 비탈에 들어선 집들이라 꼬불꼬불 계단을 이룬 골목길, 예전 모습 그대로인 흙집들, 집 뒤뜰에 울렁대는 대나무 숲....이런 모습들이 너무 정겨워서 마을에 사는 어떤 분이 마을 이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외부에 혹시 많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본래 모습이 훼손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아도 꼭 무슨 ‘지구촌 VJ’ 프로에 나오는 중국 오지 마을처럼 그렇게 비탈에 집들이 조르르 모여서 형성된 그런 마을이다. 이곳에 귀농 20기 동기생인 이선재 씨가 집을 마련해서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몇 번 따라서 놀러 갔던 터인데, 내가 갈 귀농지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던 것이 몇 군데를 둘러보아도 여의치 않자 문득 그곳으로 가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이 선재 씨의 이야기는 ‘이장을 먼저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장이 마을에 살러 오는 사람을 막을 권한은 없지만 그 마을은 워낙 작은 데다 집성촌이면서 한 곳에 모여 살기 때문에 이장을 먼저 만나서 상의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장을 만나러 아내와 같이 내려갔다.

이장은 서두에 ‘오시겠다면 그것은 자유다’라는 단서를 단 뒤 ‘그러나 마을의 방침은 외지인들이 아무나 함부로 들어와서 마을의 분위기를 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또 다른 진짜 단서를 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장이 묻는 말은 한 마디로 ‘김 선생님께서는 어떤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까?’였다. 기왕에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밖에서 무언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문인, 화가, 의사 등등 뭐 그런 것이었다. 바로 앞에도 한 사람을 영입(?)했는데 약초의 전문가이면서 침을 놓는 사람이었다. 아하! 난감했다. 회사를 키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아니 조직을 만들고 키우는 데에는, 조직 관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연구, 연수, 인사, 노무, 기획홍보, 영업, 해외 등등 모든 분야 임원을 했습니다 - 이렇게 말할 것인가 내 인생 어떻게 살아 왔는가가 처절하게 반추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를 설명하는 이런저런 긴 설명 끝에 이장이 붙인 말은 ‘아, 회사 생활을 오래 하셨군요. 그러다 일찍 퇴출 되시고....’ 이게 전부였다. 일반인과 다른 것이, 당신들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 ‘바로 이 것입니다’라고 말 할 게 하나도 뚜렷한 게 없었다. 그냥 거듭되는 말이 ‘뭐든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하고 어울려 잘 지낼 수 있다’는 그야말로 ‘나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장과의 면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자신들이 바라는 인사는 아니니까 적극적으로 환영은 못하지만 굳이 오고 싶으면 와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 재주가 없다면 무얼 해서 살아가실 것인지?’였다. 그 마을이 가느다란 계곡을 끼고 앉은 터라 농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돌이켜 보면 딱히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는데 그 곳으로는 결국 가지 못했다. 지금은 책을 내는 작가 타이틀을 달았으니 이장이 환영할까 -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귀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결국엔 인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 물론 아무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비싼 돈 주고 땅 사서 집짓고 살면 그만이겠지만.... 그런 것은 인력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과 어울려서 마음을 터놓고 마을 사람이 되어서 사는 것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발품이 들어가는 귀농 답사의 길을 굳이 어렵게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섬진강은 유장하게 흐르고, 계곡 속의 마을은 그림처럼 앉았으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정처 없는 귀농 답사의 발길은 또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니 어찌된 일인지 전라도에 한 번 발을 내딛으니 다시 전라도 땅으로 걸음이 이어졌다. 다음은 전남 보성의 녹차 밭.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 두 가지. 첫째는 자신만의 것을 가지자는 생각. 그것이 나팔을 부는 재주든, 자장을 만드는 기술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망치질이든.... 삼십 여년 직장 생활을 하고도, 회사 명함이 사라지면 자신이 뚜렷하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주가 무엇인지 불분명한 인생은 참으로 불행하다. 아니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재미없다. 그 날 그 순간, 곡성의 한 마을 이장 앞에서 ‘선생의 재주는 무엇이오?’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잘 난 김 이사’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

두 번째. 그 마을이 마을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쓰는 수법, 아니 ‘방법’인가 마을 입구에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 놈을 쇠사슬로 가로 질러 잠가 놓고 팻말을 붙였다. ‘다리가 낡아서 붕괴 위험이 있사오니 차량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외래 손님은 이장에게 연락 주십시오.’ - 멋진 아이디어다. 지금 사는 동촌리에는 봄, 여름이면 서울에서 ‘산채나물 패키지 여행’ 손님들이 대형 버스로 몰려와서 우르르 산에 올라가서 나물을 뜯고 마을 공터에서 술 마시고, 놀다 가는 모습을 보면 그 마을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이곳 동촌리 산이란 곳의 산은 나물이 남아나지 않는다. 다음 해를 생각지 않고 마구 뜯고 캐어 가 버리기 때문이다. 가을이면 송이도 남아나지 않는다. 계곡을 따라 즐비하게 차량들이 늘어서 있는데, 산에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동촌리는 농촌관광을 한다고 홍보에 열심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건설의 망치 소리와 레미콘 차량의 소음이 끊일 날이 없다. 대외 능력이 뛰어난 유능한 이장을 만난 덕인데, 가슴을 부여안은 섬진강 그 마을과 가슴을 풀어헤친 동촌리 - 어느 쪽이 과연 행복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인지는 내 식견으로는 판단이 안 선다. 세월이 조금 흘러야 판명되리라. 다만 세 가지 분명한 것은 첫째 동촌리의 땅값은 올라간다는 사실, 둘째 애초에 동촌리로 오면서 바랐던 것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 셋째 세월은 흐른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은 변한다는 것.

출처:오두막마을,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9.03.2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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