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였다. 적어도 쿠바에서는 그렇다. 카스트로와 뗏목 난민,살사와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나라. 강대국 미국의 앞마당에서 수십년간 봉쇄와 협박 속에 생존해온 쿠바는 최근 몇년 사이 전세계 환경운동가와 생태학자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인구 220만명의 수도 아바나가 최악의 식량 위기를 딛고 미래 생태도시의 새 모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사 직전의 빈곤 속에서 쿠바는 10년여년만에 지구촌에서 가장 성공한 자급자족 환경도시를 일궈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쿠바의 ‘녹색혁명’=요시다 타로의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도쿄 농림수산부에 근무하는 저자가 아바나를 한달간 체험한 현장 보고서다. 쿠바 ‘녹색 혁명’의 핵심은 도시농업에 있다. 집 앞 텃밭과 개인농가,기업농장 등 8000여곳의 도시농장에서 무려 3만여명의 ‘도시농민’이 콩과 양상추,토마토,옥수수,약초 등을 키워 인근 커뮤니티의 먹거리를 해결했다. 그것도 화학비료와 농약 없이 식충개미와 바실루스균,지렁이 퇴비 같은 천적과 미생물 농약,바이오 기술을 이용한 100% 유기농법이었다.
도시농업은 배고픔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후반 원조국 소련의 붕괴,미국의 봉쇄 정책 등으로 쿠바의 경제 시스템은 밑둥에서 무너져내렸다. 수도 아바나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석유 공급이 끊기면서 지방의 농산물은 수송 수단이 없어 썩어나간 반면 아바나에서는 굶는 사람이 늘어났다. 몇년 사이 남녀의 평균 체중이 9㎏씩 떨어졌다. 벼랑 끝에서 쿠바인들은 호미와 낫을 집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 1위,세계 11위(89년 유엔개발계획의 생활수준 지표)의 부국’ 쿠바가 한순간에 붕괴한 것은 사탕과 감귤류를 동구권에 수출하고 식료품을 수입하는 대외의존적 시스템 때문이었다. 소련은 전략적 고려로 사탕수수를 국제가격의 5.4배에 사들이고 매년 50억달러의 원조를 쏟아부으며 쿠바를 지원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이런 원조 시스템도 함께 무너졌다. 사탕수수 가격은 폭락했고 유류 공급도 끊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식료품과 의약품 공급의 중단이었다. 이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국제 사회가 집단 아사를 염려하는 사이 쿠바 정부와 국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사람들은 당장 굶지 않기 위해 쓰레기로 뒤덮인 자투리 땅에 오이와 강낭콩,당근,가지,피망의 씨를 뿌렸다. 흙이 없으면 흙을 퍼날랐다. 벽돌과 베니어 합판으로 둘레를 친 뒤 퇴비를 섞은 흙을 넣고 채소를 재배하는 쿠바의 ‘오가노포니코’는 그렇게 탄생했다.
◇생태 혁명이 가져온 것=도시농업의 효과는 놀라웠다. 배곯는 이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화학비료,농약 수입이 끊기면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유기농은 대규모 단작(單作)으로 피폐화된 땅의 생명력을 회복시켰다. 석유가 모자라 중국에서 한꺼번에 들여온 100여만대의 자전거는 헝가리제 버스가 쏟아내는 매연을 청정한 공기로 바꿔놓았고,지역별 보급원·농업연구소·‘컨설팅 숍’ 등에서 제공하는 바이오 기술의 도움으로 가정의 쓰레기와 오수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59년 카스트로 혁명 이후 빈곤 퇴치의 깃발 아래 육식과 수입밀 위주로 재편됐던 식단이 채식으로 바뀌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이곳저곳에 무농약 농장이 들어선데다 ‘한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통해 도시 경관은 푸르러졌다. 세계인들은 앞다퉈 아름다운 도시 아바나를 보러 ‘녹색 관광’을 떠났다. 감기약과 마취제마저 구하기 어려운 의약품 부족 사태는 대체의약의 발전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아바나의 텃밭 한구석에는 예외없이 오레가노와 차일로,마조람,알로에 같은 약초가 자라났다.
쿠바 정부의 선전도 눈부셨다. 도시농업은 정부와 비영리기구(NPO),200여개의 연구소가 행정적,기술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열대농업기초연구소 등 33개의 농업 관련 연구소 연구원들은 현장에 적합한 기술을 개발했고 정부는 토지 무상 대여와 기술 전수,유통 혁신 등으로 측면 지원했다. 하루 10시간씩 전기 공급이 끊기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노약자,여성에 대한 식량 배급을 최대한 유지하고 무상 의료 지원을 끊지 않았으며 교육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부의 모습에서 쿠바인들은 희망을 발견했다.
◇아바나에서 미래의 모델을 찾자=소수의 농민이 다수의 도시민을 먹여살리는 근대도시는 지난 150여년 지구촌 성장과 개발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이는 더 많은 농약과 에너지,쓰레기를 의미했다. 아바나가 제안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도시’다. 비록 풍요롭지는 않지만 외부의 물자 유입과 지원 없이 스스로 생산하고 소비하고 처리하는 시스템. 자급자족의 모델은 농촌이 도시를 지원하는 근대적 발전 도식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하나의 혁명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21세기 인류의 생존법이 이 안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우리의 이야기다. 인구 1000만의 ‘기생도시’ 서울은 어떤가. 땅이 곧 돈이자 효율인 서울에서 텃밭 채소를 만나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하물며 자급의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 조만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아바나의 모델을 배워 우리나라에서 도시농업을 시도한다고 한다. 여의도공원 한켠에서 당근과 오이의 싱싱한 잎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요시다 타로·안철환 옮김·들녘·1만원).
이영미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