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자닮 게시판  [ 모두 함께 참여하여 만드는 초저비용농업의 해법! ]

늙어가는 아내에게..
작은나무 2004-04-13 15:45:24 | 조회: 8415






-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을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서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 지 우>



2004-04-13 15:45:24
답변 수정 삭제
목록 글쓰기
게시물 댓글과 답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번호 제 목 닉네임 첨부 날짜 조회
공지 <신청마감>자닮 후원자님들을 모시고 11월 19일 강좌를 개최합니다. (1) 2024-10-21 46485
공지 후원자 전용 카카오 오픈 채팅방을 개설했습니다. - 2024-08-23 213900
공지 8월 20일 후원자님들 자닮농장 방문, 뜻깊은 자리였습니다.(사진있음) (54) 2024-05-27 759572
공지 후원자 분들과 매월 말 줌(ZOOM)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 2024-05-23 572861
공지 자닮농장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실시간 공개되고 있습니다. (13) 2023-05-19 1951166
997 그냥 가시면~ (1) - 2004-06-26 10105
996 포근한 자연이 담긴 아름다움 음악을...... - 2004-06-25 6123
995 이 시를 김선일 씨의 영전에 바칩니다. (모셔온글) (2) - 2004-06-24 7668
994 어둠속에 그 님을 생각합니다. (2) - 2004-06-25 11234
993 요즘에 피는 꽃들 (6) - 2004-06-24 8129
992 밤에 피는 꽃 (3) - 2004-06-24 10516
991 마늘,양파,감자를 아시나요 (2) - 2004-06-24 6805
990 건강하고 즐겁게..... (8) - 2004-06-24 6957
989 감자. 고구마가 이렇게 좋다니. - 2004-06-24 7257
988 아! 겨울이 그립다! (1) - 2004-06-24 6658
987 단 한 번 뿐인 삶...↖*^ㅇ^*..↗ (1) - 2004-06-24 11791
986 자농의 힘... (13) 2004-06-23 7900
985 올 여름을 시원하게... (3) - 2004-06-22 7029
984 오늘은 단오, 전통 놀이판의 의미... (4) - 2004-06-22 7201
983 다시 지리산을 말하다. (5) - 2004-06-22 7612
982 고추 사진 (5) - 2004-06-22 7000
981 나이를 먹어가는, 여자가 꿈꾸는 것은... (4) - 2004-06-21 7031
980 비오는 날.... (7) - 2004-06-21 6927
979 월요일!!! 행복한 출발를 위해~~ (2) - 2004-06-21 6413
978 <마을편지 28> 매실이 말하게 하라 (1) 2004-06-21 6722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