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망설임과 고민 가운데 경남 하동에 자연농업문화센터를 개관하기로 결정한 것은 농촌현장의 어려움 속에 적극 동참하여 함께 새로운 위로와 희망을 일궈나가기 위함입니다.

농촌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농촌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오히려 절망과 탄식의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고 한국의 환경농업을 주도해온 한 사람으로서 심한 자책감을 갖기도 합니다.

자산으로 부채를 해결할 수 없는 농민들, 아마도 어느 농촌이나 그 숫자가 50%선을 넘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한 해 농사를 지어 조수익의 절반 이상을 이자상환에 써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 가정은 분열되어 여인의 보살핌없이 커가는 아이들, 농촌에서 함께 할 동반자를 찾지 못해 가슴속 외로움으로 생기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보증에 얽매어 재산을 처분당할 위기에 놓인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전국 어디에서나 일상적인 현상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떨칠 수 없었기에 이 길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은 내려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적어도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움직임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적 삶의 흐름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내려와 원대한 비전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집착보다는 여기에 있음으로 농민 여러분들에게 든든함이, 따뜻한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련히 털어버리고, 새 길, 새 희망을 찾아나설려 해도 그럴 수조차 없게 만드는 농가 부채의 문제가 너무도 심각함을 절감합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의 근본적인 한계, 그 악순환 속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예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 비판과 탄식에 익숙해져 가는 상황입니다.

올해로 자연농업을 위해 활동을 해온 지 40년 남짓 됩니다. 전국 곳곳을 누비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현장지도차 수시로 방문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세계 농민들이 거의 흡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오지도 화학비료와 농약의 피해로 심각한 토양오염에 직면해 있고 농민들의 생활은 열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1년에 2모작도 가능한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지의 아시아권 거의 모든 나라들이 한국의 농민들이 겪고 있는 비슷한 한계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농촌은 그나마 낫고 희망적이란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환경에 그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전세계적 상황은 농민들에 의해 자초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정책 과정상 충분히 예상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철저히 계획된 결과였다는 생각으로 분노심을 갖게 될 때도 있습니다.

현 한국 농촌의 상황은 구조적인 원인으로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구조적인 정책의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대두되는 것도 지당합니다. 따라서 현 농민운동들의 보편적인 모습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이고 외부적인 원인에 집중을 하여 비난과 해결의 화살을 쏟아낸다면 과연 농민 자신은 무엇입니까 농촌을 농민이 지켜내지 못할 것이란 자의식이 농촌 가운데도 팽배해 있습니다. 농민은 이 상황을 헤치고 나갈 스스로의 역량이 전혀 없는 그저 피동적인 인간처럼 사회적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고 농민 스스로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만큼 이 시대의 개혁, 이 시대의 현실에 부합한 농민운동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농민으로서 존재하는 한 우리는 현 농촌의 상황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가능성을 내부에서 부터 찾아나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농업문화센터는 정치적인 대안 제시와 이를 위한 정책운동보다는 농민 내부의 문제점을 들추어 내고 적극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며 그 가운데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주워담고 나누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미미한 가능성이라도 실현해 나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희망의 탑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낭만적인 이상’이라는 비판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임전가식의 자기외면보다는 긍정과 새로운 출발이 더 희망의 농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정책으로 농촌을, 농업을 살리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국가경제가 세계경제 속으로의 전진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한 농민경제는 도시경제를 위한 종속변수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농업정책은 가시적, 정치적 효과를 유도하는 부분에 치우치게 되고 정작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지속적인 정책사업은 회피하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앞으로 경제정책상 농민을 외면해도 특정 정치집단이 집권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농민이 스스로를 문제삼고 변해야만 살아남습니다. 농촌 내부에서, 농민 자신 가운데서 문제점을 찾아 내 적극적인 자기변화을 이끌어 내야만 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야말로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역할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연농업문화센터는 이를 위한 새로운 농민 문화를 지역에서 일궈나가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문화센터가 위치한 곳은 하동군 악양면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빼어 닮았다 하여 신라시대 때부터 악양(岳陽)이라고 명명되었을 만큼 이 곳의 풍수는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라는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북으로는 지리산이 남쪽으로는 백운산이 감싸안고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중앙에는 대단위 평야(소설 ‘토지’의 평사리)가 펼쳐져 있고 산중턱까지 돌담으로 쌓인 논과 밭으로 어우러진 이곳은, 산악지대의 특성과 농경지대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산하의 웅장함과 농촌전경이 갖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폐교를 파격적인 조건에 장기 임대하는 과정과 공사 예산의 확보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진행되었지만 다행히도 주변 몇몇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벚꽃이 피는 이 봄에 개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설비상에 부족함이 남아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문화센터를 이용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을 것입니다. 협회 차원에서 보면 서울에 사무국겸 유통본부와 괴산에 자연농업생활학교를, 하동에 자연농업문화센터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앞으로 괴산의 학교는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자연농업문화센터는 농업과 환경, 생활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와 연구회 모임, 자연농업 독자와 회원들의 모임, 개인이용 등을 중심으로 한 운영이 될 것입니다.

특히 센터의 시설 중에서 가장 비중있게 준비되는 곳이 농업과 환경생태에 관한 ‘전문도서관’입니다. 교실 두 칸과 복도를 통합한 60여평 공간을 활용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과 유럽쪽의 농업·환경서적 등을 모아 총 1만 5천 권 정도의 서적을 구비하여 환경농업에 관심이 있는 농민들과 소비자 모두 자유스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관련비디오물이나 영화상영도 가능한 최신 시청각 시설도 구비할 계획입니다. 2층 교실 5칸은 각각 칸을 나누고 각자의 사물함을 설치해 편안하게 숙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불편함이 없도록 완벽하게 꾸며 놓았으며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100% 목화솜으로 만든 1인용 고급이불도 준비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센터를 방문하여 며칠 기거하면서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충분한 ‘쉼’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목표 중에 하나입니다.

자연농업문회센터가 편안한 ‘쉼’과 교류, 배움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그곳에 있어 위안이 될 수 있는 든든한 언덕처럼 자리매김되기를 고대하고 고대합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자연농업의 기술적 발전이 더욱 가속화 되어간다는 느낌입니다.

한국 자연농업의 저력은 자연농업을 가슴에 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자연농업문회센터가 여러분과 함께 호흡을 하며 미래로 나갈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나겠습니다.

농업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이지만 ‘농업만이 희망’인 시대가 여러분 곁으로 더욱 다가서고 있습니다. 더우기 ‘자연농업’이 희망인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

조한규 명예회장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07.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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