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닮

ⓒ www.jadam.kr 2006-02-06 [ 오현주 ]
구례 하동간 19번 국도 양편은 벚나무 천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 중 하나다.

사람들은 "시골이 뭐가 좋으냐"고 묻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도시의 복잡함을 비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켜세웁니다. 눈 오는날 악양 축지에서 하동읍까지의 10여km를 왕복하면서 시골 생활의 행복과 전원의 매력을 만끽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시골이 점점 좋아져서 큰일 났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좋을 줄을 몰랐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상상 이상입니다. 이제 겨우 5개월밖에 안됐는데도 이렇게 좋으니 앞으로 1년, 3년..., 10년 후 그 기쁨과 환희는 얼마나 커질까요.

지난해 9월에 왔습니다. 서울에서 하동으로 왔습니다. 하동에서도 웅장한 스케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악양에 말입니다. 처음엔 옷가지도 안가지고 왔습니다. 며칠이나 있겠느냐 해서지요. 친구들도 “짧으면 사흘, 길면 3주”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벌써 5개월이나 됐네요. 바로 위에서 ‘이제 겨우 5개월’이라고 했다가 방금 ‘벌써 5개월이나 됐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전생에 “냄비”였나 봅니다.

ⓒ www.jadam.kr 2006-02-06 [ 오현주 ]
자연농업문화센터 앞 정원. 역사가 오래된 학교라 단풍나무 석류나무 등 멋진 나무들이 많다.

제가 왜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떠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그러니까 2006년 2월 6일 월요일입니다. 눈이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연농업문화센터(자연을 닮은 사람들) 마당에 눈이 하얗게 쌓였습니다. 센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백운산 정상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가 생활하는 센터는 경남 하동 악양에 있습니다. 원래는 축지초등학교였습니다. 학생 수가 줄어 8년 전인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이곳을 임대해 사무실과 숙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직원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가 노트북을 켰습니다. 경제 관련 싸이트와 일간지 홈피 등을 몇 군데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가 “오늘 00님 생일입니다”라고 합니다. 00님이란 여직원의 닉네임입니다. 이곳에선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직원이 결혼 날짜도 잡았다는 겁니다. 네이트온으로 그녀에게 생일과 결혼을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그처럼 반가운 일을 동시에 축하해주는 일도 흔치 않을 겁니다.

ⓒ www.jadam.kr 2006-02-07 [ 오현주 ]
누군가가 센터 현관 앞에다 만들어놓은 눈담.

생일 파티를 점심 식사 때 하기로 했습니다. 저녁엔 또 다른 회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하동읍에 나가서 생일케잌과 생필품을 사와야 했습니다. 아무도 눈길 운전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출발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소형 승용차를 타고 교문 아니, 센터 문을 나섰습니다. 교문 옆에 신사임당 동상이 서 있습니다.

센터에는 동상이 많습니다. 이순신, 세종대왕, 이승복 어린이, 코끼리, 펭귄, 기린 등등. 여느 초등학교보다 동상이 많습니다. 학교의 재정 상태가 좋았다던가 아니면 여유 있는 졸업생이 많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시골 학교의 동상들은 주로 졸업생들이 기증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폐교라니... 그건 돈의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 아이들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 집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웃집 여학생을 보고 옆자리에 태웠습니다. 자주 봐서 친해졌습니다. 악양중학교에 다닌다고 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저는 혼자 빈차로 다니기가 미안해 목적지만 비슷하다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태워주곤 합니다. 언젠가 장수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에 할아버지를 태운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날이 따뜻해 부모 산소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또 가게 될지 몰라서 말입니다.

그 할아버지와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시골에서 살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골땅 사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연락처를 주고 내리면서 전화를 하라고 하더군요. 제가 원하는 가격의 땅을 알아봐주겠다고. 그로부터 며칠 후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지난번 고마웠다고요. 꼭 한 번 자기에게 들르라고 말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남원 아영면에 사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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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였던 관계로 센터에는 동상들이 많다. 세종대왕동상에 눈이 내린다.

교문 밖 내리막길을 내려왔습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해야지 하면서 조심스럽게 도로 위로 올라서는 순간, 이게 웬일 입니까. 길이 녹아 있었습니다. 마치 염화칼슘을 뿌려놓은 듯 두 줄의 차 바퀴 자국이 녹아 있었습니다. 악양은 그렇다고 하더군요. 눈이 잘 오지도 않고 와도 금방 녹는다고요.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구례 하동 간 19번 국도를 달렸습니다. 오른편으로 눈 덮인 평사리 벌판과 백운산이 펼쳐집니다. 토지의 최참판 댁이 보였습니다. 마치 중국의 널따란 중원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을 중국의 명승지 악양에서 따왔나 봅니다.

악양에서 하동 가는 국도변 가로수는 모두 벚나무입니다. 수령이 많아 나무의 실루엣이 멋집니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모양의 가지가 하나도 없는지 자연은 정말 오묘합니다. 가지들은 눈을 반쯤만 덮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이트 재킷에 다크그레이 슈츠를 입은 신사를 떠올리면 됩니다. 가로수들이 그런 패션으로 길 따라 죽 늘어서 있으니 전체 모양이 얼마나 판타스틱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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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평사리 들판. 토지의 무대이다. 멀리 보이는 마을 안에 최참판댁이 있다.

국도변의 신사들을 감상하면서 왼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리산 자락의 야트막한 산들과 집, 차밭, 배나무 밭에 눈들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습니다. 어릴 적 문방구에서 보던 카드 말입니다. 눈 덮인 초가집과 기와집, 아이들이 뛰어놀고 강아지가 짖어대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 조금 값비싼 건 금가루도 뿌려져 있던 카드 말입니다. 그 카드가 그대로 커다랗게 확대돼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추억이 떠올려질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오른편은 또 얼마나 멋진 줄 아십니까. 섬진강 둑 위에 백일홍이 일렬로 서 있습니다. 키가 작은 백일홍은 여려 보입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백일홍은 활짝 펴있었습니다. 하동읍에서 센터까지 태워다준 택시 기사분이 “시집갔던 딸이 백일홍이 세 번 피었다지면 친정에 간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백일홍이 잎을 모두 떨구고 대신 가느다란 가지마다 눈을 매달고 차가운 섬진강 바람을 맞고 서 있습니다. 좌우로 벚꽃나무와 백일홍이 친구들처럼 서 있는 길을 천천히 달렸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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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나무 밭. 군사들이 창을 들고 서 있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감격하고 또 감격했습니다. 제가 이 글의 모두에서 큰일 났다고 오도방정을 떤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저는 시골이 이렇게까지 커다랗고 숨막힐 정도로 벅찬 감동을 줄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마 시골에 사는 분들은 호들갑을 떤다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 여기서 몇 년 더 살아봐라, 무덤덤해질 것이다’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저는 천성적으로 면역력이 부족해서인지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부산을 떨곤 합니다.

서울에 살 때의 일입니다. 저의 직장은 광화문에 있습니다. 그곳을 24년간 다녔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30년 이상 광화문을 들락거렸습니다.아무튼 강북에서 출퇴근할 때 종로 길을 통하지 않고 빙 둘러 가는 북악스카이웨이를 택했습니다. 저 같이 에돌아가는 샐러리맨은 드물었습니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지만 가는 길에 나무가 많아서입니다. 봄에 꽃이 필 때 성북동 고갯길을 오르다보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성북동에서 삼청동으로 내려 가는 길에 삼청공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나무들이 많습니다. 벚꽃이 가득히 핍니다. 도심의 쉼터 가운데 하나이지요. 공원 바로 옆에 통일원, 금융감독원 같은 굵직한 정부 기관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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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이 이어진다.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설경이다.

삼청동과 성북동엔 한때 최고급 요정 중의 하나인 삼청각도 있고, 법정스님이 가끔 법문을 들려주는 길상사란 절도 있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집도 그곳에 있습니다. 재벌 회장들의 집과 외국 대사관들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삼청각은 고 박정희대통령이 정인숙이란 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슬며시 차를 타고 회사를 빠져나와 삼청동으로 향합니다.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대학 모교 뒷문이 삼청동으로 통합니다. 학교 건물이 명륜동에서 삼청동까지 걸쳐 있습니다. 성벽이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랫 동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화려한 꽃과 나무들을 한참 동안 감상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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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섬진강을 본 후 둑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마을 주민.

강남에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이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터널을 통과해 시내로 들어갑니다. 저는 터널을 싫어합니다. 늘 남산을 에워싸고 구불구불 나 있는 남산 순환도로를 탔습니다. 그곳의 가로수가 은행나무입니다. 가을에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들고, 남산에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듭니다. 그 길을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연이 너무 아름다우면 눈물이 나는 가 봅니다. 아마 제가 전생에 한 많은 청상과부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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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둑에 줄지어 핀 백일홍나무(왼쪽).

일부러 느리게 달렸지만 어느새 하동읍에 다 왔습니다. 호젓한 길이 사라지고 좌우에 건물들이 많아집니다. 급격한 커브 길에 이어 오른편에 나타나는 주유소와 주차 공간. 언제나 이곳을 지나가는 순간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번잡한 하동읍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비하면 일개 작은 동에 불과하겠지만 저에겐 하동읍이 어느새 광화문 한복판처럼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베이커리에 들어가 케잌을 샀습니다. 빵집 여주인이 다리를 절었습니다. 다리를 내려다보지 않고도 알았습니다. 제 옆을 지나가는데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더군요. 공연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여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여직원의 나이를 떠올렸습니다. 초를 4개 달라고 했습니다. 큰초 세개 하고, 작은 거 하나. 저는 그 나이에 이미 두 아이의 아빠로서 결혼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졌던 시기였습니다. 저 같이 결혼을 일찍 하게 되면 연애 감정을 마음껏 누리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삼십대... 얼마나 좋은 나이 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또도 아니고, 건강도 아닙니다. 그냥 20년 만 젊어지는 겁니다. 후후후... 너무 큰 욕심인가요.

시장에 들러 시금치와 콩나물을 샀습니다. 시금치가 꼬질꼬질하고 시들시들하게 보여 순간 망설이다가 그냥 달라고 했습니다. 시금치 파는 할머니가 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빨간 플래스틱 안에 있던 시금치를 비닐봉지에 옮겨 담으면서 “다 다듬었으니까 그냥 먹으면 돼요” “깨끗이 다듬었어”라고 강조합니다. 그 할머니는 저를 혼자 사는 남자로 넘겨짚고 그런 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남자들은 시금치 같은 걸 잘 씻지 못하잖습니까. 그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아도 살 건데 말입니다.

이웃집 여학생의 쇼핑을 기다려주었습니다. 시골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거든요. 여학생은 비디오테이프를 빌렸습니다. 시골에선 비디오를 많이 빌려봅니다. 시골의 젊은 여자들은 주말만 되면 영화를 보러 진주 쪽으로 나가더군요. 답답하다면서 말입니다.

여학생을 태운 후 서둘러 하동읍을 빠져나왔습니다. 읍에서 오래 있고 싶지가 않습니다. 오던 길로 그대로 달렸습니다. 백일홍이 줄지어 서 있는 부근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여학생이“산불 끄는 아저씨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산불 끄는 아저씨...참 재밌는 표현입니다. 마을 자치 소방대원인가 봅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벚나무와 백일홍, 배나무, 차밭 그리고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설경을 실컷 보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 듯합니다. 앞으로 또 어떤 행복이 다가올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갈 때 보다 더 천천히 달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여학생이 빨리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여학생은 "눈 장난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동에선 눈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는 해가 많다고 합니다. 올겨울에만 두번째 눈입니다. 여학생은 "눈을 손으로 만지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장난끼가 올라 "눈 장난은 어린애나 좋아하는 거야” 라고 놀렸습니다. 그러자 여학생은 샐쭉하더니 얼른 제 말을 되받아 “그러니까 할아버지야”라고 공격합니다. 할아버지...뜻밖의 단어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애라는 말을 들은 여학생의 분노보다 할아버지란 말을 들은 남자의 충격이 훨씬 클 것입니다. 여학생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할아버지란 말을 반복했습니다. 제 나이 쉰 둘. 할아버지란 말을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하긴 옛날에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고도 남을 나이입니다. 시대가 좋아 아저씨 대접을 받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