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대우받던 시절의 낫낫의 쓰임은 곡식이나 풀, 그리고 비교적 가는 나무를 베는 것이다. 크게 보아 쪼아 자르는 기능과 베어 자르는 기능 두 가지가 있다. 쪼고 베기 좋은 형태로 도구를 만들다보니 기역자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라는 옛말도 생겨났다.
낫은 쓰임에 따라 종류가 다르다. 요즘 많이 쓰는 낫으로는 조선낫과 왜낫이 있다. 조선낫은 형태가 우멍하다고 하여 우멍낫이고도 하고, 왜낫은 날과 자루 부분을 연결하는 슴베가 없어 평낫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낫은 날 자체가 기역자 형태인 반면에 왜낫은 거의 일자에 가깝다. 조선낫은 무쇠를 두들겨 만들어 재질이 단단하고 무겁다. 그래서 나무할 때나 쪼아서 베는 기능으로 많이 사용한다.
자루와 날을 연결하는 슴베 부분에도 날이 있어 쪼는데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왜낫은 슴베부분이 없고, 재질도 무쇠보다 강하다. 대신 날의 두께는 아주 얇다. 그래서 풀이나 곡식을 베기에 아주 적격이다. 대신 이가 잘 빠진다. 쇠의 강도는 높고, 두께는 얇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훨씬 다양한 낫들이 있었다. 풀이나 갈대 등을 밀어서 깎는 밀낫이 있었는가 하면, 날의 길이가 1m 정도나 되는 휘두르면서 베는 벌낫도 있었다. 낫이라 하면 대부분 앞으로 당겨서 베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밀낫은 긴 자루를 통해 멀리 있는 풀을 밀어서 베었다. 다양한 용도의 낫을 필요로 하였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과거 대장간에서 취급하던 농기구들은 오늘날 도심 시장의 철물점에서 주로 보게되는데, 그곳에서도 이제 조선낫은 찾아보기 어렵다. 풀무질을 하여 두들겨 만들거나 벼리어 쓰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낫이라고 하면 대개가 왜낫을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도입된 낫이라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가 쉽게 빠지고 잘 부러지기가 일쑤라 대부분의 농가에는 녹슬고 부러진 낫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런 왜낫마저 사용하는 예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 제초제를 뿌려 아예 풀을 말려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예취기(刈取機)를 이용하며, 가을이면 들판의 곡식을 콤바인으로 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허리를 구부려 풀이나 곡식을 베는 모습 대신에 앵앵거리는 기계 소리가 시골의 산천을 울리고, 그도 아니면 분무기를 등에 메고 논둑을 걷는 농부들을 자주 본다. 제초제를 치는 모습이다. 조상들의 묘에 풀을 벨 때도 요즘은 풀 베는 예취기를 갖고 가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띤다.
이렇듯 낫이 사라지는 사회적 변화는 풀을 이용한 거름을 준비하지 않는 농업방식과도 관련이 깊다. 화학비료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들마다 거름더미가 산더미 같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힘들여 산이며 들에서 풀을 베어 거름을 장만하려고 하지 않는다. 질 좋고 효과 빠른 화학 비료를 때맞춰 농협에서 사오면 된다. 그러니 풀을 벨 이유가 없다.
옛날 같으면 자기 논둑이나 밭둑의 풀을 남이 절대 베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농가에서 소를 키우니 꼴도 필요하고 거름도 만들어야 하기에 농가마다 풀베기가 경쟁이었다. 자라기가 무섭게 풀을 베곤 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소를 키워도 소먹이를 수입산 사료로 대신한다. 그래서 요즘 농촌에는 풀이 지천으로 깔렸다. 그렇게 유용하던 풀들의 신세가 제초제에 죽어가고 예취기에 잘려 흩어져야 한다. 귀찮은 존재고, 제거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제초제로 인해 노랗게 말라죽는 풀이나 예취기에 잘려 사방으로 흩어진 풀은 거름이 될 수 없고 소먹이가 될 수도 없다. 낫으로 가지런하게 벤 풀만이 다시 이용할 수 있다. 제초제를 친 곳이나 예취기로 풀을 벤 곳은 낫으로 벤 것처럼 그렇게 말끔하고 가지런하지도 않다.
숫돌에 시퍼렇게 간 낫으로 아침 이슬 머금고 있는 논둑의 풀들을 베어 보라. 비록 풀을 베어 죽이는 일이지만 결코 잔인하다는 느낌은 추호도 없다. 날 끝에 베어나가는 풀 잘리는 소리와 코끝에 느껴지는 풀 내음은 죽임의 현장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향연임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베어 낸 논둑에는 보름이 멀다하고 다시 새 생명이 올라온다. 풀은 베지 않으면 나무가 자라나 숲이 된다. 거름이 되고 소먹이가 될 풀은 계속 베어주어야 역시 계속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된다.
황금 들판의 벼를 거두어들일 때도 낫으로 해보자. 허리가 아프고 손에는 물집이 생기지만 하나하나 나의 손으로 곡식을 거둬들인다는 보람이 거기에 있다. 콤바인으로 휑하니 베어 버리고 난 뒤의 허전함이나 허무함 대신 나락 단으로 들어 찬 들판의 군상(群像)들을 보면서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여유와 기쁨이 있다.
그런 낭만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도 있다. 남의 손과 남의 기계를 빌려 일을 하다보니 여유가 없고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콤바인을 이용하던 곳도 애써 품을 사서 손으로 직접 벼를 베는 곳이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 비록 품이 많이 들지만 거둬들인 곡식의 양이 기계로 추수할 때 보다 많고 볏짚 이용이 용이해서 더 이익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계화된 것, 편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땀에 젖는 삶이 더 좋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삽, 농기구 맞아농가에서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농기구들로는 대개 괭이, 호미, 낫 등이 있다. 괭이는 땅을 파서 일구는데 주로 사용하는 연장이고, 호미는 김매는데 사용하는 연장이며, 낫은 풀과 곡식을 베어 거두는 연장이다. 이들과 더불어 삽 한 자루 정도는 갖추고 있는 것이 농가의 실정이다. 그러나 농사일과 관련해 딱히 삽의 용도를 지목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농기구를 현장 답사하면서 정리한 김광언 교수의 {한국의 농기구}에도 가는 연장, 삶는 연장, 씨 뿌리는 연장, 거름주는 연장, 매는 연장, 물대는 연장, 거두는 연장 등 농기구들을 16종목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분류에서 삽은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삽은 선생의 분류에서 완전히 빠져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농업과 관련한 박물관에서도 삽은 전시에서 빠져 있다. 무슨 이유일까.
삽은 농기구가 아닌 것인가. 한결같이 삽을 농기구로 간주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엄연히 농가에서는 아주 필요한 기구이고 또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고 농촌 현장으로 눈을 돌려보자.
논에 나가는 농부라 하면 빈손으로 가는 예는 드물다. 딱히 정해진 농사일이 없다하더라도 삽 한 자루 정도는 가지고 나간다. 혹 무슨 긴급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대비이다. 벼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벼의 작황에 따른 논물 관리이기에 논에 나가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논물이다. 이 때 삽은 물꼬를 열거나 닫는데 아주 유용하다. 그렇다고 삽이 물대는 연장은 아니다. 물대는 연장으로는 두레, 용두레, 맞두레, 무자위 등이 따로 있다.
삽은 농촌에서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특별히 농사와 관련해 그 역할이 정해진 것은 없다. 각종 농사를 비롯한 작업의 보조적인 용구로 많이 사용된다. 그렇지만 쓰임새는 아주 다양하다. 도랑을 친다거나, 마당을 정리한다거나, 흙과 관련한 사소한 일을 할 때마다 삽이 필요하다. 집이나 건물을 짓는 공사 현장에도 삽은 꼭 필요하다. 땅을 파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흙을 퍼 나르기도 하고, 흙을 뒤집어엎기도 하고, 삽날을 이용해 무엇을 자르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뉘여 놓고 깔고 앉아 담배를 피기도 하고, 땅에 박아 세워 의지하면서 쉬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삽을 놀이기구로도 곧잘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삽, 1m 내외의 길이에 손잡이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오늘날의 삽은 우리 전래의 것이기보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도입된 것이다. 아마도 농사일과 상관없이 토목이나 건축작업과 관련하여 도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삽이 우리 농사에서 필요 없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 없었던 것도 아니다. 14세기 초 중국에서 쓰여진 {왕정농서(王禎農書)}를 참고하면 삽은 논농사와 관련하여 도랑을 파거나 하는 수리(水利)도구였다. 한자 표기로는 삽( ), 초( )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골 어른들의 제보에 의하면, 우리 고유의 삽은 오늘날의 삽보다 길고 손잡이의 형태도 다르다. 그냥 일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삽은 가래( 혹은 錢)와 흡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도 삽을 '삽가래'라 부르는 예가 많은데, 이는 그러한 저간의 사정이 반영된 듯 하다. 하지만 삽과 가래는 분명 달랐다. 삽은 혼자 힘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수리도구였던 반면에, 가래는 세 명 이상 힘을 합쳐 사용하는 농기구였다. 그러던 것이 혼자 힘으로 사용하기에도 좋고 휴대에도 편리한 일본 삽이 도입되면서 전래의 삽과 가래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삽은 오늘날 농사를 비롯한 흙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도구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듯 농사 이외에도 많이 쓰이는 기구라 농기구에 대한 전문 연구자나 연구기관에서조차 삽을 농기구에 포함시키지 않은 듯 하며, 특히 근래에 수입된 형태라 더욱 그런 듯 하다.
김매기의 귀재 호미전래적으로 김매기의 도구로는 호미와 괭이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작물에 따라 후치(극젱이)와 소를 이용해 빈 고랑을 갈아엎는 경우도 있었다. 호미는 지역과 토질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여러 가지이다. 대체로 자루가 짧고 날 끝이 뾰족한 삼각형의 호미와 자루가 길고 날 끝이 넓은 양귀호미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밭농사가 상대적으로 많고, 조방 농업을 주로 하는 한반도 북쪽은 양귀호미를 많이 쓰고, 논농사가 많고 집약농업 형태인 남부지역은 역삼각형의 뾰족한 것을 많이 쓴다. 전자는 곡식을 심지 않은 빈 고랑을 흙과 함께 긁어 풀을 제거하고 곡식에 북돋아주는(培土) 김매기 방식에서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후자는 곡식 포기 사이사이의 풀을 일일이 김매는데 사용한다.
전자가 노동생산성 중심의 조방농업이고, 후자는 전자보다 품을 많이 들이는 노동집약적 방식의 농업방식이다. 제한된 토지를 이용해 집약적인 노동의 투여를 통한 토지생산성을 높이기에 주력한 결과이다. 시대적으로 보아도 조방농업의 성격이 강한 옛날일수록 자루가 긴 호미가 많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대를 내려올수록 인구가 많아지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노동집약형으로 김매기 방식이 변화하였고, 호미의 형태도 짧고 뾰족한 것으로 바뀐 것이라 하겠다. 제주도는 호미를 골갱이라고 하는데 돌과 자갈이 많아 거의 갈고리에 가까운 형태이다.
형태상으로 보아 호미는 밭호미와 논호미로 분류하기도 한다. 밭호미는 위에서 언급한 후자 형태에 해당하고, 논호미는 자루는 밭호미와 비슷하게 짧지만 날이 크고 슴베의 휨도 훨씬 커서 논의 빈 고랑을 뒤집어엎기에 좋다. 거의 손 쟁기라 하여도 무방할 듯 하다. 논은 밭과 달리 풀을 일일이 매는 것이 아니라 흙을 뒤집어 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김매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대적, 지역적으로 보아 경작지의 상태와 경작방법에 따라 호미의 형태나 기능이 다르게 변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김매기가 농사의 태반이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조차 '호미 끝에 100가지 곡식이 달렸다(鋤頭自有百本禾)'고 하였으며, '곡식의 성장은 오직 김매는 공에 달렸다(禾穀成長有賴鋤功)'라고 하였다. 김매기의 대표적인 농기구가 호미이고 보니 호미 끝이 가지 않으면 제대로 되는 곡식이 없다는 말이다. 제초제도 없고 화학비료도 없던 시절 곡식의 성장은 호미로 김매기를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반영하듯 밭농사의 김매기 즉, 잡초제거와 관련한 옛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라고, 밭농사는 호미 끝 가는 데로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는 밭농사의 대부분이 호미로 하는 김매기였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논은 묵혀도 밭은 묵히면 안 된다'는 말에는 밭은 묵히게 되면 잡초로 인해 농사 자체가 어려워지니 어떤 일이 있어서도 묵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잡초 1년 키우면 7년 고생한다'라는 경고의 말까지도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김매기 작업방식과 관련하여 '거친 두벌이 꼼꼼 애벌보다 낫다'라고 하여 김매기에는 적기가 있음을 알려주는 말도 있다. 꼼꼼하게 김을 매다보면 일손은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다. 느릿느릿 김을 매다보면 풀을 다 매기도 전에 매지 않은 곳은 이미 우뚝 자라 걷잡을 수 없다. 그러면 김매는데 품이 두 배 세 배 들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미 김매기를 한 곳에 다시 풀이 돋기 시작한다. 시골 어른들께서는 '김매고 돌아서면 또다시 풀이 돋는다'고 하시는데, 천천히 꼼꼼히 매다가는 결국 김매기가 되지 않는다. 작물별로 김매기를 하는 시기가 비록 다르긴 하지만 주로 곡식의 성장기에 이루어져야 하기에 단기 집약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밭농사에는 이웃간의 품앗이를 통해 '풀 잡기 작전'에 돌입하고, 논농사에서는 마을내의 두레나 '손 모으기'를 통해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음력 7월 보름 백중날을 전후한 '호미씻이'나 '풋굿'은 논농사의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시점의 농민축제였다. 이러한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 문화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점차 사라졌다. 기계화와 제초제, 비닐 농법 등으로 김매기의 관행이 줄어들면서 호미의 기능도 축소되어 간 것이다.
글 가져온 곳 : 계간 귀농통문 15호 / 2000년 가을
김재호 : 경북 예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안동대학교에서 민속학 강의를 하고 있다
기사등록일시 : 2008.12.3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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