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닮

누추하기 짝이 없는 거처인지라 겨우살이가 풍찬노숙이 따로 없다. 마을에서 외딴 바람 벌판에 세워진 집이기에 추운 밤 장작불을 안 모았다가는 얼어죽기 딱 좋은 집에서 어언 몇 해째 기숙인가. 체험으로 얻은 지혜가 모여 첫 해처럼 오돌오돌 떨며 동태신세 직전까지 가는 불상사는 없게 되었다.

두꺼운 비닐을 사다가 바람 틈마다 안팎으로 단도리를 마쳤고 엊그제는 하루종일 불을 때서 구들도 미리 숨통을 열어 놓았다. 하였더니 온기하고는 상관없던 윗목까지 설설 끓어 겨울날 방안 거치 하는 데 한 시름은 놓게 되었다. 목재소에서 얻어온 각목 자투리는 그만하면 올 겨울 지낼 장작 분량으로 충분하겠고 불쏘시개로 쓸 마른 콩대며 잔솔가지도 더미로 쟁여 둔 뒤다. 식량 걱정도 없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까지 마을 분들이 나눠 먹자며 지고 온 쌀도 벌써 대여섯 가마니가 넘는다. 뜨신 방에 뜨신 밥이라, 이만하면 엄동설한이 하나 두렵지가 않구나.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앞갈망이 해결되니 걱정거리가 하나 없는 요즈음이다. 나 혼자 이렇게 풍요로워도 된단 말인가.

하늘이 우중충한 것으로 보아 방약무인하기 짝이 없는 칼바람만 불어 친다면 첫눈도 기대해 볼 만한 어간이다. 콩밭에 들어가 두부를 찾는다더니, 성질머리하고는 벌써부터 첫눈타령이냐 하시겠다.

사실 요새 나는 주술사나 된 듯 토방에 쪼그려 앉아 마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터 폴 앤 메리의 저 아름다운 노래 <크리스마스 디너 Christmas Dinner>를 배경음악 삼아 싸락눈 흩날리는 성탄전야를 소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바람이 춥긴 추워진 모양이다.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들이 일제히 춥다며 어덜덜 떨어댄다. 마지막 달려있던 잎새마저 바람에 쓸려 투욱 떨어진다. 나무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알거지 신세로구나.

이걸 보고서 일본의 옛 시인 ‘이싸’는 이렇게 노래한 걸까.

저무는 가을,

거지가 내 옷을

오랫동안 쳐다보네

저 헐벗은 나무가 오랫동안 나를, 내 옷을 민망하리만큼 쳐다보고 있구나.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 살아보려고 무던 애를 써보긴 하지만 아직도 나는 당당 멀었어. 암, 멀었고 말고. 더 비우고 더 버리고 끝간 없이 나투어 대자유의 성심에 가 닿을 순 없는 걸까,

나는 건축기사 뺨친다는 한국 종교계의 성직자답게 눈만 떴다 하면 회당을 어떤 모델로 새로 지어 볼까 그런 궁리를 하지 않고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며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락 매상도 코 앞이고 능력 좋다는 부흥사님 모셔다가 한 판 벌려서 빈약한 재정을 어떻게 좀 확충해 보시지 않겠느냐고 뿔 달린 무엇이 꼬드기는 말로 그리한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귀청이 떨어져라 큰 목소리로 대답을 준다.

“웃기지 마. 나는 이로써 충분히 족해! 다른 데나 가 보시지.”

이 빗물 스며드는 남루한 거처에 쓸쓸한 노래를 들으며 청승맞게 훌쩍이는 날이 많아도 아직도 나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동네 주점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둘러앉아 마신 술로 숙취의 날이 잦아도 부끄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나의 내면의 몸에 친친 걸친 옷, 남을 슬프게 하고 가엾게 하고서 걸쳐 입은 옷, 저울을 속이고 어떤 때는 빼앗다시피 입은 옷, 천년 만년 입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고집하는 옷, 있다면 어서 벗어 던져야 할 것이라고 마음에 아픈 자문(自問)을 던져 본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간인지라 결단까지는 머뭇거림이 길더라도 마침내 그리하고 말 것이라는 지향(指向) 하나만큼은 번뜩이는 칼날처럼 옆구리에 차고 살아가리라.

이 바람찬 날 눈 맑은 거지 하나가 오랫동안 내 옷을 쳐다보고 있다. 알몸인 나무 한 그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운영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09.0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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