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 헤르만 헤세의 시 <행복해 진다는 것> 중에서

육십,칠십대의 딸,아들이 팔십, 구십대의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 기뻐하며 울부짖던 남북이산가족들의 상봉도 꿈이련 듯 지나갔다. 나 자신이 이산가족이나 되는 듯, 북한 사람들이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이 가까워 질수록 더욱 떨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TV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들의 짧은 만남으로 ‘살아있어줘서 고마운 사람들’ 과 ‘내곁에 있어줘서 고마운 것들’은 무엇인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온 것들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해, 조금은 심각한 병명으로 병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서리맞은 나무, 나무잎 떨구듯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정말 가슴아린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올곧게 살려고 살아왔던 지난 젊은 시절이 회한과 겹쳐져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치우면서 더욱 고통스러워 했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파 어차피 다 빠질 머리라면 다 밀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결심을 했다.

미용실에 들러 삭발을 하기 전까지 가슴이 얼마나 콩닥콩닥 거렸었는지 모른다. 삭발한 머리로 몇달을 지냈다.

입원해 있을 때나 외출할 때마다 모자를 쓰고 지내면서 긴머리를 묶기도 하고 예쁜 핀 번갈아 꽂아 보기도 하며 머리모양을 여러 가지로 바꿔보는 것도 굉장히 큰 행복이었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서울에 입원하러 갈 때마다 머리를 기르면 예쁜 핀을 꽂으면서 행복해 할 자신을 생각하며 머리핀이나 끈을 사게 되었다.

병원생활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육류, 어패류 섭취를 않기로 하자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먹어서는 안될 음식이 많은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 불편함으로 사람이 무엇이든지 잘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큰 행복을 품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잃어버리기 전의 지난 날을 아쉬워하고,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소중함을 뒤늦게 깨닺는다 해서 그 순간이 행복하지는 않다.

그 깨달음은 단지 행복의 가능성을 상실한 후회에 불과할 뿐이다.

오리려 행복은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지니고 사는지를 깊이 음미하며 그 순간, 이를 소중하고 고맙게 여기는데 있는 것 같다.

머리는 다시 자라기 시작해 이제 핀을 꽂을 수 있고 약간의 모양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병상에서 앉아 했던 행복한 빗질 생각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며 그 만치 행복해 하지 않는다.

다시 길어진 머리를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애초에 느꼈던 행복감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나 다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자매가 있고 친구가 있어도 그들의 살아있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모르고 당연하게 그냥 살아간다.

두 다리로 걷고, 두 팔로 일을 하고,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이면 별이 뜨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산다.

그러나 행복은 일상속에 숨어있다. 병원생활을 하면서 행복이 숨겨진 상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평범한 나의 일상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 이제 가을이 성큼다가와 추석이 코 앞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먼 귀향길에 오를 많은 사람들의 행렬, 두 손 가득 고향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꾸러미와 웃음다발을 안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어떨까, 이번 고향집 방문을 이산가족 상봉 버젼으로 한다면

이번 추석을 통해 ‘살아있어줘서 고마운 사람들’ 과 ‘내곁에 있어줘서 고마운 것들’은 무엇인지 꼼꼼히 생각해 보는 값진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부자든 가난하든, 지위가 높던 낮던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그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감사와 기쁨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그런 만남.

그래서 서로의 볼을 비비며 “네가 살아있는게 참 고맙다.”고 말해줄 수 있는 감동적인 만남이 함께 하는 추석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이렇게 살아있음이 참 행복한 그런 가을날이 되기를 바래본다.

■ 김춘란님는 강원도 영월 패랭이골에 있는 <은총의 집>에서 갈곳 없는 어린아이,중·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15년째 생활하고 있다.

운영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09.0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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