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뜨내기일 뿐 촌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한 머슴일 뿐 감독자가 아닙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손에 들린 붓입니다.

젤라레딘 루미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자리에 서서 보니,

"이곳은 내 땅, 저 곳은 네 땅,"

"이곳은 내 집, 저 곳은 네 집" 하면서

주인행세를 하던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옹색한 것인지를 알겠습니다.

자연의 통치자,

우주의 지배자를

자처한 인간의 오만이

치기(稚氣)에 불과했음을 알겠습니다.

인간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다는 둥,

생명의 신비를 밝혀냈다는 둥

요란스레 떠벌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목숨이 우리 손에 들린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이 어둠의 한복판에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은 우주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다소 퉁명한 자비를 달래어,

자비가 이끄는 대로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화가와 붓의 관계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손에 들린 붓이 되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다보면,

붓을 잘 아시고,

그림이 어떻게 될지 잘 아시는 그분께서

걸작을 그리시지 않겠나 싶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두 손가락 사이에서 살면서

순간순간 우리의 입술에서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늘 함께 있었더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시편 73:21-23

운영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09.20 11:36

<저작권자 © 자닮,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