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닮

ⓒ www.jadam.kr 2006-01-24 [ 오현주 ]
부산에서 살다 함양으로 들어간 박중기 씨. 박씨의 집은 함양의 아름다운 집으로 뽑히기도 했다.

대기업 사내 커플이었던 박중기 황민애 씨 부부는 차례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부산의 아파트를 정리해 경남 함양의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에서 자연의 생명력에 감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부부는 밭을 매면서 무아지경에 이르는 밭 삼매경에도 빠진다.
“시골 어디가 좋을까.”

귀농이나 전원생활을 하려는 이들은 어디에 정착을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한다. 대부분 한번쯤은 강원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다. 춥다는 이유에서이다. 겨울이 남쪽 지방 보다 훨씬 길어 그만큼 난방비가 많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남쪽은 어떤가. 전라도나 경상도 쪽은 땅값도 상대적으로 덜 비싸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다양하고, 관광지도 많아 솔깃해진다. 그러나 서울과 멀다는 이유에서 선뜻 가지를 못한다.

귀농지의 위치를 거론할 때 서울에서 3시간 정도라면 좋다는 말들을 한다. 그 정도의 거리에 오염이 덜 된 곳으로 무주, 장수 그리고 함양, 영주, 봉화 같은 지명이 오르내린다. 그 가운데 함양이 산 좋고, 깨끗하다는 말들을 여럿에게서 들었다. 정말 함양이 좋은가. 함양에서 전원생활 하는 이를 수소문한 끝에 우연히 이 글의 주인공 박중기 씨(55세)를 만나게 됐다.

부산 태생의 박씨는 부산에서 30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5년 전 함양으로 들어간 케이스이다. 2006년 1월 중순 어느 날, 박중기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시골에서의 삶을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신촌마을. 함양읍에서 백전면 표지판을 보고 달렸다. 함양의 유명한 상림을 지나 왼편으로 하천을 끼고 달렸다. 산과 나무, 밭들의 형색이 오래된 마을이란 느낌을 준다. 봄에 꽃이 피면 무척 예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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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 씨 부부가 거실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리창을 통해 앞산이 훤히 바라다보인다.

백전면을 지나 가던 길로 8km를 더 올라가자 백운계곡 매표소가 나타났다. 매표소 입구에서 산 쪽을 바라보자 박씨가 얘기한 이층 목조주택이 보였다. 집들이 별로 없고 그나마 시골집들뿐이라 한눈에 알아보았다.

박씨의 집은 경사진 면에 위치해 있다. 왼편으로는 백운산 등산로가 나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다. 덕유산, 백운산으로 해서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그만큼 산세가 좋고 공기가 맑다. 박씨의 집 옆으로 깊은 계곡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집 오른편은 소나무 숲이고, 집 앞은 월경산이 앉아 있다. 정상에는 눈이 남아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박씨의 집은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리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다. 밭 한쪽에 예쁘게 색칠한 재래식화장실이 있었다. 함양의 아름다운 집으로 선정될 만하다.

박씨의 집 앞에 승용차를 세우자 박씨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 오른편에 문패 대신 여백가(餘白家)라는 나무조각이 걸려 있었다. 여백- 빈공간을 채워나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투박하게 새긴 한자가 정감 있어 보였다. 박씨의 안내로 거실로 들어갔다. 거대한 거실 유리창을 통해 따뜻한 겨울 햇살이 한가득 들어왔다. 앞산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 박씨의 개가 데크에 앉아 있었다. 벽난로의 불이 훈훈했다. 작은 탁자에 책이 몇 권 쌓여 있었다. 박씨는 책을 보고 있었던 듯 했다. 박씨의 부인 황민애(49세)씨는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 중이었다.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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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열이 잘돼 벽난로 하나로도 집안이 훈훈했다.

-오는 길에 ‘상림’이란 곳을 보았어요.

“아름다운 곳이지요. 시간나면 가곤 합니다. 가을에 단풍 들면 기가 막힙니다. 정신을 빼앗길 정도에요.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홍수를 막으려고 조성한 숲이라고 해요. 상수리나무 등 나무들이 많습니다. 함양을 대표하는 장소이고 천연기념물로 전국에서 보러들 옵니다.”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이란 냇가 옆에 있다. 총면적이 약 21ha로 숲의 길이가 1.6k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며, 120여종 2만여 그루의 낙엽, 활엽수가 어우러져 있다.

박씨는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인 KT를 다녔다.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이다. 그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시골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무얼까. 함양은 어떤 연고가 있어서 들어오게 됐을까.

“도회지가 싫기도 했고, 농사짓는 사람들 보면 공연히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과연 내 월급이 그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을 해서 받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고요. 10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자녀 교육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다가 지난 2001년 일을 저질렀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곧바로 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하는 귀농학교 교육 신청을 했다. 충남 홍성에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한편으로 정착지도 알아보았다. 경주, 하동 쪽을 마음에 두었다. 부산에서 가깝고, 도시도 마음에 들어서이다.

박씨는 하동을 자주 들렀다. 따뜻하고,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고, 산천도 좋고, 땅도 비옥하고 다 좋았다. 그런데 땅값이 만만치 않았다. 경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함양에 사는 고교 후배가 이곳을 권했다.

“겨울에 와 봤어요. 어쩐지 마음에 동하더군요. 산과 계곡이 있고, 땅 앞뒤로 혐오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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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도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회사를 나온 지 이틀 만에 귀농학교에 들어갔고, 땅을 보고 나서 이틀 만에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결단력이다. 귀농은 박씨 처럼 우선 저지르고 봐야 한다. 너무 재고, 따지고, 걱정하다 보면 아무 것도 되는 법이 없다. 그런 점에서는 박씨의 부인도 부창부수이다. 남편이 시골 가자고 하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남편이 원하는 거니까 한 번 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따라 들어왔어요. 아마 이것저것 따지고 했으면 못 왔을 지도 모르지요.”

실제로 시골에 들어와 살아보니 하루 세끼 밥 해먹는 게 스트레스일 뿐 그 외에는 좋기만 하단다. 황민애 씨도 20여년간 KT를 다녔다. 사내 커플이었다. IMF 직후 구조 조정 무렵이었다. 부부가 한 직장에 같이 다닐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집의 가장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황씨가 먼저 그만 두었다. 1999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박씨도 사표를 내고 부산의 아파트를 정리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사실 귀농이 아닙니다. 귀농이라면 아이들도 데리고 들어와 학교도 보내고 농사를 생업으로 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텃밭 정도니까 전원생활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부부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 딸은 서울의 오피스텔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 박씨의 어머니는 부산에 친지들이 많아 이곳에 함께 들어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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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기엔 밭이 넓어 매실나무를 심었다.

박씨는 함양군 백전의 900여 평의 밭을 구입해 일부를 대지로 바꾸었다. 밭을 대지로 바꾸는 과정에서 면. 군의 행정 처리 절차 및 농지 관련법에 대해 박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땅 구입과 건축비 등 모두해서 1억6천여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시골 땅값은 정해진 게 아닙니다. 같은 땅이라도 외지인이 들어와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마을 주민들끼리 거래되는 가격의 두세 배는 높게 부릅니다.”

박씨는 2001년 10월, 집터를 닦을 때부터 인터넷 귀농학교 동기생 싸이트에 집짓기 보고를 했다. 박씨가 쓴 글의 일부분을 보자.

“어제까지 집짓기는 약 30% 진척되었습니다만 그저께는 비가 와서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목재집인 관계로 비를 맞는 벽체와 일부 지붕을 보니 제 자식을 벌거숭이로 벌판에 세워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구조는 콘크리트 통 기초 위에 부식되지 않는 나무를 깔고 그 위에 목재와 OSB 합판으로 벽체를 세워 그 틈과 벽체 사이에 인슐레이션(유리섬유, 소음차단과 단열)을 충진 시킨 다음 다시 합판을 붙이고 그 위에 석고보드를 2장 붙이고 난 뒤 도배를 하며, 집 외벽에는 반 통나무(목재 사이딩)를 부착하며, 지붕은 역시 나무로 만든 다음 방수포를 입히고 이중 그림자 슁글을 붙이는 모양새입니다. 집짓기는 어차피 업체에 맡겼으니 훈수도 못하고 멀거니 구경만 하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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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밭 한켠에 만든 황토 무저장고. 땅속에 무를 넣어두면 상하지 않고 늘 신선하다.

박씨는 집 짓는데 애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업체 측에서 약속한 대로 2개월 안에 완공을 해주었고, 추가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성실하게 마무리해주었다고. 조적조나 콘크리트로 짓는 경우 자재를 현지 조달하는 일이 많아 공기에 차질이 생기는 등 애를 먹는다고 한다. 반면에 양생 기간이 필요 없는 목조주택은 시공 날짜가 늦춰지는 일이 거의 없다고. 나무만 준비되면 끝이다. 35톤 차 한 대 분량이 들어갔다.

“우리 집을 지어준 업자분이 사람이 좋아요. 목수 대여섯 명이 투입됐습니다. 저는 함양에 있으면서 집 짓는 거 구경만 했어요. 보는 것만도 재미있던데요.”

그 대신 인근의 사찰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 별 문제 없이 해결을 보았다.

인부들은 집만 달랑 지어놓고 가버려 나머지 축대를 쌓는 일서부터 조경에 이르기까지 주변 정리를 박씨 혼자 힘으로 다해야 했다. 예컨데 마당에 수도를 놓는 일이 그것이다. 박씨가 귀농학교 동기생들의 싸이트에 올린 글을 보자.

“25mm 검은색 파이프를 100m 사서 적당한 경사가 있어야 하므로 덩굴을 헤치고 개울 위쪽으로 어깨에 메고 들어 갔는데...오랫동안 원형으로 감겨 있던 뻣뻣한 파이프라 자꾸만 둥굴게 말려들고 펴지지는 않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100미터를 깔았습니다. 수도꼭지를 집터 옆에 설치하고 개울에 다시 올라가 막돌과 잔돌을 이용해 흐르는 물속에 박고는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었지요. 물론 나중에 완벽하게 보강해야겠지요. 그리고 관도 땅에 묻어야 하고요. 수도꼭지를 틀자 세찬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기쁨이란,,,! 이런 맛에 노동을 하는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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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는 연장들이 가득하다. 손재주가 뛰어난 박씨는 나무로 책상 책장 탁상 등 뭐든지 만들어낸다.

박씨의 집은 1,2층 합쳐 총 38평이다. 1층엔 거실과 주방, 방 둘에 커다란 욕실이 있다. 이층엔 자그만 서재와 방이 하나 있다. 주방에서 보면 밭이 보인다. 부인이 음식을 장만하며 남편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창으로도 밭이 보인다. 서재의 창에서도 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집 어디서나 밖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설계는 박씨가 직접 했다. 인터넷으로 각종 전원주택 싸이트에 들어가 보고 참고로 해서 그렸다. 박씨는 “군청에 가면 다양한 전원주택 모델들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박씨의 집은 보온 시설을 잘 해서인지 춥지가 않았다. 난방은 주로 벽난로에 의지한다. 처음 벽난로를 만들 때는 부부가 벽난로 앞에서 차를 마시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멋으로 만든 벽난로가 이제는 필수품이 되었다고.

벽난로는 나무를 땐다. 나무 값이 기름 값 보다 훨씬 적게 든다. 거실 전체를 따뜻하게 하려면 기름값이 한 달에 50만 원 이상이 들어가지만 나무는 10만 원 안팎이다. 함양의 경우는 겨울이 길다. 11월부터 3월까지 불을 때야 한다. 낙엽송, 소나무 등 7~8톤이면 3년은 쓴다. 땔감 구입도 어렵지 않다. 산림조합에서 사면 톤당 7~8만 원, 장작으로 사면 10만 원 선,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면 톤당 3만 원에도 구입할 수 있다. 주변 사람의 경우는 약속 날짜를 믿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산에 올라가서 직접 나무를 해오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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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자그만 서재에서 인터넷으로 세상 소식을 듣는다. 책상은 박씨가 만들었다.

집에 대한 불만은 없다. 단지 목조주택이어서 일 년에 한 번씩 전체 페인트칠을 해주어야 한다. 칠은 박씨 부부가 직접 한다. 업자에게 맡기면 품값만 1백만 원이다. 칠을 하는 날은 부부가 사다리 타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편다.

그러나 몇 년째 살다보니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집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집이 크니까 난방비가 많이 들고, 뭔가 자꾸 채우려고 한다. 또 시골에서 위화감 같은 것도 생길 수가 있다.

“처음에 주변의 조언도 안 듣고 내 판단 하에 지었어요. 부산에 살던 아파트 거실을 재보니 4m 정도였어요. 시골이니까 좀 줄여서 3m면 되겠다, 그쯤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식으로 주방, 방들을 넣다 보니까 집이 커버린 겁니다.”

박씨는 새로 집을 짓는다면 열다섯 평 정도로 자그마하게 지을 거라고 한다. 그것도 돈 많이 들이지 않고 겉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안을 오밀조밀하게 할 생각이라고. 박씨는 이 집에서 65살까지는 살 계획이다.

박씨는 집을 짓고 남은 700여 평에 농사를 지었다. 텃밭보다는 조금 규모가 크다. 물론 농사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선배 귀농자들에게 묻고, 책을 통해 배웠다. 이웃 노인들이 가르쳐주는 것들이 가장 도움이 됐다고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엔 노동이 하고 싶었어요. 회사 책상에서 글이나 쓰고 몸을 안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하잖아요. 몸을 안 쓰다가 갑자기 심하게 부리니까 인대가 늘어나 오랫동안 고생했어요. 농사가 서툴러 허구헌날 호미 괭이 낫으로 다리를 찍어 흉터 천지에요. 요즘은 잘 안 찍지만요.”

박씨는 농기계가 없다. 전부 손으로 한다. 기계로 하면 한두 시간에 마칠 일을 며칠씩 걸려서 끝낸다. 제초제도 쓰지 않는다. 친환경적으로 짓는다. 충을 막기 위해 목초액도 해보고 담배에 비눗물을 타서 써보았다. 비눗물은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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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 씨 부부는 인생에서 취미나 추구하는 것들이 비슷하다. 시골행에 대해서도 뜻이 맞았다.

작년의 경우 콩 4말, 고구마, 감자 각각 150kg, 무 250개를 수확했다. 고추 380주를 심었는데 탄저병으로 다 말라죽어 수확을 하나도 못했다. 돌려짓기를 하지 않아서였다. 풋고추만 겨우 따먹을 정도였다. 당근 치커리 상추 부추 가지 등 20여 가지 야채 농사도 지었다. 3년 전, 밭의 3분의 2에다가 1년생 청매실을 심었다. 밭의 토피 층이 얇아 작물이 잘 안 되고, 혼자 짓기에 너무 넓어서였다. 매실을 따려면 앞으로 2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올해는 고추를 안 심고 대신 서리태, 고구마, 당근을 많이 심을 계획이다.

“농사짓는 재미가 아주 좋습니다. 봄, 여름 새벽에 밭에서 김이 올라옵니다. 작물이 크고...그런 거 보면 눈이 즐거워요.”

박씨의 부인은 밭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콩밭 메는 일은 한다. 콩은 6월에 씨를 뿌려 11월에 수확한다. 싹이 나서 자리 잡을 때 풀을 솎아 주어야 한다. 그 때가 한여름이다. 배적삼이 다 젖는다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무척 힘이 든다고 한다.

“남자는 신체 구조상 밭에서 쭈그리고 일하는 게 쉽지 않아요. 여자들은 무게 중심이 낮아 장시간 밭에 앉아 일하는 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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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를 집으로 개조해 민박을 했다. 사람도 만날 겸 해서다.

박씨는 시골 생활에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도시의 꼴을 보지 않아 살 것 같다고 한다. 박씨는 도시에 살면서 오락실, 나이트클럽 등 환락시설에 대해 모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사회주의 성향도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런 것들을 피해 있는 자체가 좋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건 보너스인 셈이다.

“옛날 선비들이 관동 8경하면서 자연의 절경을 예찬했듯이 함양 8경, 백운 6경 같은 게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좀 전에 얘기한, 새벽 밭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입니다. 하얗게 올라오는 그 광경을 보면 행복해요.”

그리고 겨울에,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하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야경 또한 절경이다. 그럴 때는 일부러 나가서 본다. 별이 하늘 가득 반짝이고, 은하수가 쏟아질 듯 하다. 가을에 수풀 사이로 해가 지는 노을의 짧은 시간도 숨 막히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의 경이로운 장면들을 접할 때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시골 생활의 맛은 이런 걸 하나씩 발견해가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남편의 말을 듣던 황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산나물 먹는 것도 있잖아요. 봄에 취나물, 고사리, 머위, 두릅도 그렇고요.”

집 뒤의 산에서 직접 캔 산나물을 생으로 먹거나 데쳐서 초장에 찍어먹기도 한다. 그 향과 생생한 맛을 어디다 비교하랴. 부산에 살 때 나물을 사다 먹었지만 비교가 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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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부부가 만들어 내놓은 곶감. 쫀득하고 씨가 없어 먹기에 아주 좋았다.

박씨는 시골에 들어와 체력이 좋아졌다. 도시에선 배도 나오고 몸에 탄력이 없었는데 시골 들어와서 날씬해졌고 지구력도 생겼다. 집 짓고 나서 2년여 동안 노동을 많이 했다. 나무도 심고 땅도 고르고 담도 쌓고...

황씨는 오히려 살이 조금 쪘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사먹는 일이 많았지만 이곳에선 웬만한 건 다 만들어 먹는다. 장도 담그고, 두부도 만들어 먹는다. 곶감도 만들어 먹고, 감식초도 담근다. 인터넷을 통해 요리를 배우기도 한다. 물맛이 좋아 장맛도 좋다. 하루 세끼를 해먹으니 간장도 많이 들어간다고.

부부는 음식의 대부분을 자급자족 한다. 밭에서 나는 작물로 만들어 먹으니 부식비는 거의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씨가 “생활비요 대부분이 땅값하고 그걸 물어봐요. 여기서는 20만 원에서 200만원 사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시골에서는 쓰기 나름이다. 20만 원 갖고도 살고, 200만 원 갖고도 사는 곳이 시골이란다. 우선 시골에서는 의류비가 들지 않는다. 옷장에 신사복이 잔뜩 있지만 입을 데가 없다. 회사 다닐 때는 경조사비가 한 달에 3,40만원이 들었다. 여기서는 몰라서 안 오기도 하지만 그 쪽 지출이 뚝 끊겼다. 해 떨어지면 갈 데가 없으니까 쓸 데도 없다. 읍에 나갈 일도 한꺼번에 몰아서 간다. 도서관 가는 길에 장 볼일을 묶어서 본다. 핸드폰 인터넷 등 통신비가 7만원 안쪽, 승용차 기름값이 15만 원 선이다. 한 달에 세 번 정도 외식을 하고, 한 번 정도 읍이나 진주에 나가 영화를 본다.

“돈이 있든 없든 저희는 도시에서도 검소한 생활을 해왔어요. 검소함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씨도 “나이가 들면, 시골서 생활하려면 뭐든 줄여야 해요. 소비를 줄이고, 새것을 안 사고, 가진 것을 버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시골에 들어오려는 이들에게 한 가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그것은 산골 외딴 곳에서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산골에서, 지적인 대화가 없는 산골에서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책을 봅니다. 겨울에 대략 100권을 읽어요. 겨울에는 남자들이 할 일이 없어요. 여자들은 장을 담거나 음식을 하든가 뭔가 할 일이 있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박씨는 무언가 만들어내면서 겨울나기를 한다. 창고에 끌, 조각용 칼, 대패 등 연장이 가득하다. 책상, 책장 등은 직접 만들어 쓴다. 찻상도 만들고, 술상도 만든다. 그의 솜씨는 그의 선친에게서 대물림 받은 듯하다. 박씨의 방에 있는 멋진 장롱은 선친의 작품으로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섰다.

황씨는 남편을 가리켜 “전생에 석수쟁이였는가 보다”고 우스개소리를 한다. 나무를 캐다 정원을 꾸미고, 현관 앞을 납작한 돌로 세련되게 장식하기도 한다. 솜씨가 프로급이다.

박씨 부부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민박을 시작했다. 박씨 집 뒤에 있는 단독 목조집으로 방 2개와 큼지막한 욕실을 갖추었다. 작년 여름 16~17가구가 다녀갔다.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는다. 민박 싸이트에 올라간 것을 보고 찾아오기도 하고, 전 직장 동료의 소개를 받고 오기도 한다. 와서 잠을 잔 이들은 모두 만족해서 돌아간다고 한다.

“함양은 문화적인 장소가 거의 없어요. 옛날에는 귀향지였어요. 고립된 지역입니다. 사람이 조용한 걸 좋아하면서도 몸은 따로 원합니다. 수준에 맞는 공통의 대화가 필요한 데 여기서는 그런 게 안돼요.”

70~80대의 시골 노인들과 지적인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 주고받으면 더 이상의 화제거리가 없어진다. 공연히 남의 집 사정이나 입에 올리게 되고.

산골에 들어온 이후 2년 동안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 대부분 자고 간다. 부산에 살 때는 동료들을 밖에서 만났지만 이곳에선 집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스트레스일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가 되고 요즘은 끈이 있는 사람만 온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손님이 오면 반갑기 짝이 없다.

부부는 생활의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인터넷이 거리감을 해결해준다. 우체국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면 하루 이틀 만에 택배로 배달 된다. 장도 인터넷으로 본다. 싱싱한 생선이나 고기도 얼마든지 배달해 먹을 수 있다.

박씨는 현재 일정한 수입이 없다. 과연 얼마를 갖고 시골로 들어가야 박씨 부부처럼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유 있는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박씨는 이와 관련해 “둘이서 맞벌이를 했고, 직장을 30년 다녔고, 아파트 하나 갖고 있었다면 대충 얼마 인지 계산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서 박씨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이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네팔 같은 곳에선 차 한 잔에 30원 한다고. 그나마 관광객이라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면 가진 것이 적더라도 충분히 살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개인 사정은 있겠지만 7~8억씩 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10억 재산 모으기 등 기를 쓰면서 돈을 모으려는 이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박씨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돈에 대해 갖는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가까운 지인이 박씨에게 땅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박씨 부부는 하룻밤을 고민한 끝에 일부러 그 지인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완곡하게 거절을 했다.

“땅값이 어떻게 되든 우리가 투자를 하는 순간 이곳 생활이 흔들립니다. 오르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는데 산골에서 밭이나 매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내리면 본전 생각나서 또 가만히 못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부부는 취미도 비슷하고, 추구하는 것도 비슷하다. 산을 좋아하며,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해외 여행을 다녀온다. 2월 초, 네팔을 다녀올 예정이다.

부인 황민애 씨는 “가끔은 도회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도시에서 뭔가 배우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여기서 즐거운 것을 찾으면 됩니다. 밭에 나가서 일하면 밭 삼매경에 빠져요.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잡념이 싹 사라집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박중기 씨가 밭 삼매경이란 말이 좋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밭에서 일에 열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부부는 산골에서 그런 행복에 취해 산다고 입을 모았다.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01.24 12:56

#박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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