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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러 가자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하는 아내는 웬 떡이냐 싶은지 선뜻 따라 나섰다. 나는 좀 멀리,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디로 방향을 잡을까 하다가, 시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우포늪이 생각났다.

새 보러 가자

 

꽃들이 만개하는 계절이건만 나는 도무지 하루하루가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긴 여행, 강연, 글쓰기…등 여러 분주한 일에 시달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파김치처럼 늘어졌다. 그래도 쉴 틈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열흘쯤 되었을까, 나는 아내와 함께 춘천 YWCA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피곤한 걸음으로 집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여보, 저 집은 꽃만으로도 부자네요!”

 

아내가 문득 탄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꽃만으로도 부자라는 집을 쳐다보니, 우리가 사는 바로 옆집인데, 대문 옆에 자목련나무가 아기들 주먹만한 꽃망울을 펑펑 터뜨리고 있었다.

 

“어허, 정말 그렇구먼!”

 

시큰둥한 내 대꾸에 아내가 당장 퉁아리를 안겼다.

 

“어디 아퍼요 명색이 시인이란 이가 겨우 그렇게밖에 대꾸를 못한단 말예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냥 씩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아내 말대로 어디가 아프긴 아픈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꼭 찝어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는 요즘 들어 만사에 의욕이 안 생기고 쉽게 지쳤다. 이게 탈진인 모양이구나. 나는 곁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애틋한 마음이 싹트지 않았다. 모처럼 차를 마시는 시간이면 아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붙여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가끔씩 말대꾸는 하지만, 아내가 하는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없었다.

 

꿈쟁이인 아내는 간밤에 꾼 꿈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친구 중에 인간의 꿈을 연구하는 정신분석가 친구가 있어서 꿈은 소중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아니, 꿈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지시하는 신의 암호와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들려주는 꿈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그저 귓등으로 흘려듣곤 했다. 꿈에 산중의 호랑이를 만나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어디를 갔다든지, 바다 위로 무슨 철판이 깔린 길을 조심조심 걸어갔다든지, 남편인 내가 왕이 되어 붉은 용포를 입고 있었다든지… 아내는 자기가 꾼 황당하고 이상한 꿈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아내가 하는 말에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다. 서로 몸 붙여 살아가는 이의 삶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내 영혼이 병들어 있음을 의미함에 틀림없었다.

 

며칠 전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새 보러 갑시다!”

 

내가 ‘새 보러 가자’는 말은 물이 있는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나자는 의미였다. 동해안에 터 잡고 살 때 왠지 사는 게 답답해지면 가끔씩 바다나 호수로 진짜 새를 보러 가곤 했었다.

 

“우와, 좋지요!”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하는 아내는 웬 떡이냐 싶은지 선뜻 따라 나섰다. 나는 좀 멀리,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디로 방향을 잡을까 하다가, 시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우포늪이 생각났다. 우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빵빵하게 채운 뒤 한산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북도 창녕으로 내달렸다.

 

해질 무렵, 우리는 저녁놀이 발갛게 물드는 우포늪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포늪 인근에 사는 후배 시인이 마중을 나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칠십만 평이나 되는 드넓은 우포늪! 우리는 늪가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걸으며 연둣빛 잎이 피는 버드나무와 자운영, 그리고 고니와 기러기, 왜가리, 가창오리떼를 만날 수 있었다. 물가에 선 나무들이 녹빛 물에 제 모습을 거꾸로 비추며 운치를 더해 주었다. 잠시 후 조금씩 날이 저물자 물 위를 자맥질하거나 조용히 떠다니던 새들이 약속이나 한 듯 물 위로 날아오르더니 늪을 떠나 저무는 산을 향해 대열을 지어 날아들 갔다. 우리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푸른 자운영 밭에 멍하니 앉아서 보랏빛 어스름에 잠기는 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렇게 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창조를 끝낸 신이 안식을 취했다고 하는데, 그 안식일을 ‘신의 심장이 쉬는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어느 문헌에서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무와 풀, 새와 사람 등 만상이 물의 고요 속으로 잠겨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창조를 위해 일한 신이 있다면 그 뜀뛰는 신의 심장도 쉬어야 할 시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분주하게 사느라 힘겨워 했던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시계바늘도 잠시 멎어 있었다.

 

아니, 세속의 시간을 여윈 늪의 물은 제 슬하에 나를 들여앉히고 온전한 쉼을 선사해 주었다. 물 없는 사막 같은 세상에서 탈진한 나를, 그래서 길을 물으러 온 물의 문도(聞道)인 내게, 물은 ‘네가 누구냐’고 묻지 않고 말없이 환대해 주었다. 탈진한 내가 돌아가야 할 존재의 원천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스스로 그러함’[自然]이 있는 곳, 분주함의 시계바늘이 돌지 않는 곳, 나는 그곳에 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곳이 어떤 특정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처럼 내가 나를 내려놓을 수 있으면 그곳이 내가 돌아갈 곳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처럼 낯선 곳을 찾아서 ‘스스로 그러함’ 속에 몸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가까이 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나무나 풀, 고니나 왜가리 같은 생명들은 인간들처럼 스스로 보채지 않는다. 스스로 그러함에 자기를 내맡기고 살 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떠한가. 중국의 왕필이란 이가 <노자 역해>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온 힘을 다해서 무거운 것을 들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에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탈진이란 온 힘을 다해 무거운 것을 든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인간이 탈진에 이르면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탈진하면 나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마저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력(餘力)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할 여력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왕필에 의하면 여력은 ‘허심’(虛心)에서 생긴다. 허심이 생기면,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스스로 그러함에 자기를 내맡길 수 있다.

 

나는 저물녘의 우포늪을 보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하루를 더 머물렀다. 그 늪의 한가로운 여백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질 녘의 늪과 해뜰 녘의 늪은 그 빛과 색과 향이 달랐다. 또한 늪은 어느 방향에 앉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늪가에 도착하자 해질녘에 떠났던 새들이 벌써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새들을 구경하느라 한나절을 다 보냈다. 고니나 왜가리떼가 물을 헤이며 물고기를 잡아먹는 모습이며,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물에서 떠올랐다가 좀더 먼 자리로 가서 물 위로 사뿐 착지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만 있어도 그냥 좋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새들의 ‘무위(無爲)의 춤’을 보며 허허로움에 잠겨들 수 있었다. 내 몸 속의 세포들도 새들처럼 ‘무위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칠십만 평의 빈 시간, 칠십만 평의 고요! 새들이 들고 날며 저마다 들릴 만큼 지저귀었지만, 그것이 내 마음의 평정과 고요를 깨뜨리지는 않았다. 마음의 고요는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이라는 어느 수도자의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시 한 수도 잔잔한 물 위로 홀연히 떠올랐다.

 

새들의 노래가 목마른 내 갈망에

 

잠시 휴식을 안겨준다.

 

나 또한 저들처럼 이토록 황홀한데

 

그런데, 말이 나오지를 않는구나.

 

오, 우주의 영혼이여

 

제발 나를 통해서 무슨 노래든지 불러다오.

 

―잘라루딘 루미 <새들의 노래>

 

고진하,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4.04.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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