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이 아니라서, 단지 수탉촛대이므로 꼬끼오! 하고 울어제치지는 않지만, 새벽마다 일어나 수탉벼슬에 꽂힌 초에 불을 밝혀줍니다. 초에 불을 밝히면 타오르는 불꽃은 수탉 벼슬처럼 일어섭니다. 작은 불꽃이 점점 커지면 어둠은 사라지고 꼬끼오! 하고 우는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수탉촛대는 지난겨울 네팔 여행 중에 한 골동품 가게에서 샀습니다. 가게의 먼지 덮인 진열대에 놓인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촛대는 먼지 속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촛대를 얼른 집어 들었습니다. 값이 꽤 나갔지만 나는 값을 치르고 그것을 손에 넣었습니다. 지금도 보면 볼수록 잘 샀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수탉촛대로 해서 우리 가족의 생활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온 식구가 늦잠을 떨치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새벽 5시! 요즘 우리 식구들의 기상 시간입니다.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깨면 먼저 촛불부터 켭니다. 수탉촛대 위에서 촛불이 깜빡거리며 커지면 꼬끼오! 하는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어릴 적, 시골에 살며 수탉 울음소리에 깨어나던 좋은 버릇을 복원한 셈입니다.
촛불을 켜고 나면, 우리 부부는 맞절을 합니다.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며칠 동안 하고 나니 이젠 익숙해졌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맞절을 합니다. 처음에는 수를 세며 했지만 요즘은 온몸이 훈훈해질 때까지 합니다. 좀 많아 하는 날은 이마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네팔에 머무는 동안 익혀온 습관을 지속하는 셈입니다.
맞절이 끝나고 나면, 하루를 시작하는 인사를 서로에게 합니다.
“나마스떼!”
네팔 사람들에게 배운 인사말입니다. 눈 맑고 깊은 네팔 사람들이 거리나 숙소에서 만날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건네오던 ‘나마스떼!’란 인사말! 나는 그들의 부드러운 미소와 그 인사말에 담긴 뜻에 깊이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신이 그대 안에 있는 신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나마스떼!’란 인사말에 담긴 뜻이라지요. 아마도 세상에서 이런 깊은 뜻을 담은 인사말은 다시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 속에 신성(神性)이 깃들여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처럼 간단한 인사말에 그것을 함축하고 있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종족이든 인사하는 관습 같은 것은 그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인간을 신처럼 떠받들어 공경하는 그들의 마음이 그런 인사말로 나타난 것이 아닐는지요. 이런 인사말이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비롯됨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나마스테!’란 인사말의 깊은 뜻을 알고 난 뒤, 나는 맞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맞절을 하고 나면 나와 함께 맞절을 한 아내나 아이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아내가 단지 아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이고, 내 자식이 단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간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너와 나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기 때문입니다. 묶이지만 서로를 구속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나는 나와 함께 맞절을 한 그들을, 내가 지닌 신성을 지닌 그들을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12세기 경 일본에 이큐(一休) 선사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선사는 탁발을 하는 중에 어느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한 여인이 흰 살을 드러내놓고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버드나무에 가려지긴 했어도 보일 것은 다 보였습니다. 마을 어귀를 돌던 이큐 선사도 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선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삿갓을 벗어들고 합장을 한 채 그 여인을 향해 세 번 절을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이큐 선사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스님, 당신은 존귀한 승녀의 신분으로 부처님이 아닌 목욕하는 여인을 향해 절을 하시니 이해할 수 없군요. 장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까?”
이큐 선사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잘 모르는 말입니다. 여성이란 불법(佛法)의 보고입니다. 여성은 세상의 모든 존귀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존귀한 불법을 설해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 대사도 모두 여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당신들도, 그리고 나도 여성에게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 나무나 바위 뿌리에서 난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인도 현자도 모두 여성에게서 났습니다. 여성은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내가 절을 한 것이오.”
사람들은 이큐 선사의 말을 듣고 모두 한 마디씩 했습니다.
“오늘 참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 잘만 놈이고 못난 놈이고 모두 여자한테서 나왔지!”
“나도 오늘 여자한테 절을 해 볼까?”
이 이야기는 여성을 비하(卑下)하던 시절에, 어떤 인간도 ‘신성’을 지니지 않은 자가 없다는 깨우침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사가 말한 ‘여성은 불법(佛法)의 보고’란 표현이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전제가 없고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학대와 폭력이 멈출 수 없고, 모든 종교가 되뇌이는 자비의 가르침도 허황된 교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절!
나를 바닥까지 낮추는 절, 그것은 내게 어떤 울타리에 나를 가두는 종교의식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지만, 내 존재의 궁극적인 그 무엇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과의 결합입니다. 나와 맞절하는 이가 아내이든 자식이든, 나는 그들을 있게 한 궁극적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느낍니다.
맞절이 끝나고 경전 한 구절을 달게 받아먹고 나면 수탉 벼슬처럼 불타오르는 촛불을 끕니다. 그리고 창을 열면, 붉은 태양이 내가 걸어가야 할 하루를 고맙게 비쳐줍니다.
고진하,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4.04.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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