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병화(역사연구가)
우리 민족사에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국가를 영위한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전58~427)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꿨던 고려(427~668)와 태조 왕건이 건국한 고려(918~1393)가 있다.
조선朝鮮(1393~1896)이 고려를 이어 건국한 1393년 이후 고려라는 국호는 쓰이지 않았지만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은 조선을 고려로 인식했고, 오늘날에도 우리 스스로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The Republic of Great Han이 아니라 The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우리민족의 역사상 고려라는 나라는 인접 국가는 물론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대륙에 있던 나라
고려는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었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국력을 지니고 이웃했던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화려했던 고려가 남긴 역사문화 유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고려의 도읍지가 한반도 경기도에 위치한 개성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개성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에 부합되는 역사유적이 없다.
외성, 내성, 궁성 등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곽의 자취가 없고, 궁궐이나 사찰, 그리고 사당이나 공공건물, 그리고 민가의 자취나 흔적이 전혀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면 한반도의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 개경이라는 인식은 허구에 바탕을 둔 가설일 뿐이다.
한반도가 고려의 강역에 포함되는 주변지역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될 수 있지만 고려의 중심강역은 대륙에 있었고, 도읍지 또한 대륙에 있었던 건원칭제국이었다.
고려는 료遼, 송宋, 금金, 원元, 명明 등과 이웃하고 있었는데 송 ․ 금과는 화친했었고, 료의 끈질긴 침입을 막아냈으며, 원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4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강화하면서 국가의 존립을 지켰다.
그러나 고려는 명의 침략이 두려워 명의 압박에 굴복한 친명파들에 의해 멸망했다.
존명 사대를 표방한 조선은 명과 왜倭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한 채 대륙의 강토를 지키지 못하고 대륙에서 반도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대륙의 강토를 명에 빼앗겼던 것이다.
송악松嶽,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은 각각 다른 곳
고려의 도읍지는 송악松嶽과 개경開京,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임진臨津, 그리고 한양漢陽과 송경松京 등이다. 또 라주羅州, 복주福州, 청주淸州, 덕수德水 등도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옮겨다녔던 잠깐 동안의 임시도읍지였다.<표 1>
건국당시 도려의 도읍지는 태봉泰封(911~918)의 도읍지였던 송악松嶽이었다. 건국한 이듬해 태조 왕건은 개경開京으로 신궁을 조성하고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8대 현종 때(1010) 글안契丹의 침입으로 라주로 피난했다가 다음해 개경으로 환도했고, 23대 고종 때(1232)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도로 도읍을 옮겼다가 강도에 인접한 송도로 옮겨가서 몽골에 저항했다. 24대 원종 때(1270) 몽골과 강화하면서 오랜 피난시대를 마감하고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25대 충렬왕 때(1290)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잠시 강도로 피난했었고, 31대 공민왕 때(1361) 홍두적의 침입으로 복주로 피했다가 청주와 덕수를 거쳐 개경으로 환도했다.
고려는 31대 공민왕 때 원에 빼앗겼던 국토를 대부분 회복했지만 원을 멸망시킨 명에게 회복한 국토를 또다시 빼앗기면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1363년 도읍을 임진으로 옮겼는데 32대 우왕 때(1381)는 한양으로 1383년에는 송경으로 옮겼다.
34대 공양왕 때(1390) 잠시 한양으로 옮겼다가 1391년에는 다시 송경으로 옮기고 1392년에 멸망했다.
대륙고려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역사유적
고려의 도읍지 송악은 하남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였고, 개경은 하남성 등봉시登封市였다.<지도 1> 송악과 개경은 인접한 곳으로 대륙 하남성 공의시와 등봉시에는 오늘날에도 고려의 궁궐과 사당 그리고 사찰들이 남아있다. 하남성 등봉시에는 그곳이 고려의 도읍지였음을 검증하는 특징적 유적이 있다.
바로 천체관측 유적이다. 천체관측은 지난날 황제의 특권이었다. 천체의 변화는 귀중한 정보였기 때문에 관측된 정보는 특정인 이외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체관측소가 있던 곳은 황제가 살던 황성 또는 황궁이 있던 곳이다.
하남성 등봉시가 고려가 아닌 다른 나라의 도읍지였다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의 관변학계에서는 등봉시에 남아있는 천체관측 유적을 관성대觀星臺라고 부르면서 원대元代의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곳이 원의 도읍지가 아니었다는 판단이 옳다는 것은 역사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의 황제가 살던 도읍지는 화림和林, 대도大都, 개평開平, 그리고 응창應昌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옮겼던 피난 도읍지 강도는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송도는 강소성 남경시南京市였다. 이곳에 지금도 남아있는 궁궐, 사찰 등의 역사유적을 고려사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그곳이 고려의 피난 도읍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강화도에는 고려의 유적이 없다.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만들었던 선원사는 강소성 진강시에 있지만 강화도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강도는 강화가 아니다. 고려 때 강화는 송악과 개경에 인접한 곳으로 강도와는 엄청난 거리에 떨어진 곳이다. 강화는 하남성 의마시義馬市였다. 이곳에 고조선 때 쌓은 삼랑성과 고려 때의 이궁離宮이 있다. 강도는 송도와 인접한 곳이고, 강화는 송악과 인접한 곳이었음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고려가 홍두적洪頭賊의 침입으로 옮겼던 임시 도읍지 복주福州는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이다. 그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곳이 고려의 황제가 머물던 곳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고려의 청주는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이다. 이곳에는 금속활자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외흥덕사外興德寺가 있다. 외흥덕사는 한양漢陽(산동성 제남시濟南市)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 딸린 절이었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흥덕사와 외흥덕사는 그 흔적도 찾지 못했지만 대륙 산동성에서는 그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서 불법 약탈해간 직지直旨를 간행한 곳은 대륙의 산동성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고려의 덕수는 하남성 락양시洛陽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최대 사찰이었던 흥왕사興王寺가 있던 곳이다. 흥왕사의 본찰은 수십 곳의 딸린 사찰을 관장하던 대규모 사찰이었다. 승려가 만 명이 넘었고 두 곳의 현縣이 흥왕사에 귀속되었다.
건축물의 규모 또한 거대해 조선초 축조한 경복궁 건축규모의 10배 이상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대륙 하남성 락양시에는 지금도 수십군데 사찰건물이 남아있고 유적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한漢, 당唐의 도읍지였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당은 불교를 억제했던 나라였고, 기존에 설립된 사찰도 없애고 수도권 밖으로 내몰았다.
오늘 날 한반도 개성과 그 주변에는 사찰 건물이 즐비했다고 하는 흥왕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덕수라는 지명도 없다. 반도사관을 조작한 조선은 한반도 개성부근에 고려의 궁성조차도 재현시키지 못하는 형편에 흥왕사라는 거대규모의 사찰유적을 극히 일부라도 재현시키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홍두적과 명, 북으로는 여진, 남과 동으로는 왜의 침탈로 국토의 보전이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국토의 서쪽 하남성의 개경에서 동쪽 산동성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전에 하남성 개봉시인 임진을 거쳤다.
조선의 건국지였던 송경은 고려말의 도읍지였다. 한양과 송경은 인접한 곳이다. 한양은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송경은 산동성 임청시臨淸市이다. 조선초의 한양과 송경은 대륙 산동성에 있었다.
사경四京과 삼소三蘇
고려는 개경외에 동경, 서경, 남경을 설치했다. 동경은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慶州로 안휘성安徽省 합비시合肥市이다. 서경은 고려(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평양平壤으로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경은 후백제의 주요 도시였던 익주益州로 호남성湖北省 단강구시丹江口市이다.
고려가 개경부근에 새롭게 건설했던 도읍지는 양주楊州였는데 양주는 남경이 아니라 신경新京이었다. 신경은 하남성 허창시許昌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역사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려의 남경이었다고 억지 주장하는 서울에서 고려의 유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도참설을 신봉했던 고려의 황실은 개경부근에 세 곳의 길지를 택해 궁궐을 축조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는 고조선 때의 진한, 막한(또는 마한), 번한의 각 도읍지를 국가의 중심으로 중시했던 전통의 연장이다.
고려의 삼소는 백악산白岳山의 송림松林, 백마산白馬山의 승천부昇天府, 기달산其達山의 협계陜溪인데, 송림은 하남성 우주시禹州市, 승천부는 하남성 여주시汝州市, 협계는 하남성 락녕형洛寧縣이다. 고조선의 삼소나 고려의 삼소는 모두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세 곳으로 저울추, 저울대, 저울접시에 비견될 수 있는 거리상으로 균형잡힌 곳이다.<표 2> 대륙 하남성에는 고려의 궁궐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곳곳에 축조한 이궁과 행궁
송악과 개경, 동서남의 삼경, 신경, 강도, 송도, 임진, 한양, 송경에 고려의 궁궐이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삼소에도 당연히 고려의 화려한 궁궐이 있었다.
임시도읍지였던 라주, 복주, 청주, 덕수에도 궁궐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도 고려는 여러 곳에 이궁과 행궁을 축조했다.
그 중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강화江華, 광주廣州, 백주白州, 진위振威, 그리고 봉화奉化 등이다.
한반도에 이곳과 지명이 같은 곳은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고려의 궁궐은 찾아볼 수 없고, 또 그 흔적조차 없다.
광주는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백주는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 진위는 하남성 녹읍현鹿邑縣, 봉화는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궁궐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표 3>
고려는 목조건축물, 금속활자, 도자기, 황칠 등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나라였다. 전성기 때의 국토는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호북성, 호남성의 전지역과 산서성, 섬서성의 대부분, 그리고 한반도와 만주를 그 통치영역으로 관장했던 거대한 건원칭제국이었다.
그 문화유산은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이전할 때 팔만대장경판, 도자기, 불상과 불탑 등 극히 일부 옮겨온 것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중화민국(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중국 각성의 역사고고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류기석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12.0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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