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가능하면서도 조화로운 삶,
그 삶의 터전은 무엇이고 그곳에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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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좋아서 선택한 자연 속에서의 삶을 통해 알게 모르게 자연을 훼손하고 거스르고 있음은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듯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자연 속에 어울려 사는 것인지, 무엇이 진정 사람을 위하고 자연을 위한 것인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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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해야겠다 결심하고 시골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닐 때 땅이며 집이며, 소위 귀농지의 명당이라는 곳들을 다양하게 구경하게 되었다.
집터 가까이에 냇가나 강이 있으면 좋겠다, 집을 반허리쯤 에워쌀 정도의 소나무라도 몇 그루 있으면, 댓잎 소리 실어다 줄 아름드리 대나무숲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전망이 툭 트여 저 멀리 산등성이로 해지고 해뜨는 아름다움에 날마다 마주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동안 수십 수백 채는 족히 올렸다 허물어내렸을 '나의 집' 청사진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고는 퍽이나 뿌듯해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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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穴)과 명당(明堂)은 풍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이다.
우리 선조들은 음택(陰宅;묘지)을 정할 때 시체가 직접 땅에 접하여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을 혈의 기준으로 삼았고, 이 혈 앞의 넓고 평평한 땅을 '양기(陽基:집)'라 하여 넓고 평탄하고 원만한 곳, 좁고 경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은 곳을 명당으로 선호했다. 고려가 개경(開京)을 도읍으로 정한 것과 조선의 한양 천도도 진혈(眞穴)의 맥을 짚어 실행한 것이니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자리에서 살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땅의 기운을 얻어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땅에 대한 사고가 논리화 된' 풍수지리설에 기인했을 것이다.
생활을 담는 그릇, '집'
'집'은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네모난 그릇에 물을 담으면 그 물은 네모일 것이고 동그란 그릇에 담긴 물은 동그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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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벌판에 내던져진 인류는 자연 지형물에 의존해 토굴이나 바위 밑 같은 임시거처에 살다 맹수로부터 또는, 덥거나 추운 바깥 공기로부터의 피신처로서 집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초막이나 움막을 지으면서는 땀과 피로 지어올린 살림집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살이'에 관한 모든 문화는 한걸음씩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우리 선조들은 생활을 담는 그릇을 어떻게 빚으며 살았을까, 옛것으로부터 돌고돌아 오늘에 비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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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국의 민속마을 몇 군데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이 가장 자주 들른 곳이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의 '외암민속마을'은 예부터 삼다(三多)의 마을이라 했다. 돌이 많아서 석다(石多), 말이 많다고 언다(言多), 양반이 많다고 반다(班多)라고 불리웠다. 양반의 마을이라 일컬어지듯 외암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양반가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고관대작의 집집은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마을의 골목길을 둘러보긴 수월해도 양반가 마당 안을 들여다 보긴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느라 '민속마을'이라 부르면서도 마을 안에서 생활하는 후손들의 생활은 옛것을 지키며 사는 것을 은근히 강요 당하고 있었다. 화장실이나 지붕 등을 수리할 때조차 그들은 '허가'와 '신고'를 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고 들은 것이 몇 해 전이니 요즘은 좀 융통성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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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을 떠올리면 나로선 늘 '돌담'이다.
마을 곳곳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돌담들을 이은 것을 재 보니 모두 5.3km의 길이라 한다. 그다지 정교하게 쌓은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도 허물어지지 않은 채 흐트러지지도 않은, 풍상의 세월을 견뎌온 그들의 묵묵함을 느낄 수 있는, 야트막한 담장으로 오가던 정겨움이 들리는 듯하다.
(계속)
한지숙(gulter@janong.com / gulter00@hanmail.net)
한지숙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5.02.0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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